8월29일 오전 10시,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 브리핑을 하기 위해 용산 대통령실 연단에 섰다. 전공의 집단 사직 후 7개월. ‘의료 붕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기자들의 질문은 의·정 갈등을 해결할 방안에 집중됐다. “저는 얼마든지 (협상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했다. 의사 단체들과 소통해왔지만 통일된 의견이 도출이 안 된다. 저희들은 열린 마음으로 검토하겠다고 여러 번 얘기를 했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 한다. 오히려 (의대 증원 규모를) 줄이라고 한다.”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앞서 지난 4월1일에도 윤 대통령은 비슷한 발언을
나는 한 의과대학의 본과생으로, 2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다른 생각을 가진 의대생/전공의(@any_medics)’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했다. 올해 초 학교를 떠난 의대생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다. 사태 초기 정부도 시민들도, 그리고 의대 내부에서도 의대생들의 수업 거부가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의대 입시 일정이 시작된 8월에도 의사들이 지금의 단결을 유지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비타협적 낙관론이 의대생·의사 커뮤니티 내에 팽배하다.‘메디스태프(medistaff)’는 의사 면허나 학생증을 통해
서울 한 구급대원의 구급차 이송 기록지에는 지난 2월부터 7개월간 이어진 의료 공백 탓에 응급환자들이 겪는 고초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중 한 사례다. 한 여성이 폭행을 당해 정수리에 2~3㎝ 열상, 후두부 열상, 팔뚝에 찰과상을 입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구급차에 탄 환자는 온몸이 아프다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그런데 갈 수 있는 응급실이 단 한 곳도 없었다. 구급대원은 서울과 경기 지역 17개 병원에서 환자 진료가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119 구급상황관리센터에 요청, 재요청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시간을 떠돈
파리 올림픽이 끝났다. 이번에도 스포츠 스타들이 배출되고 새로운 기록이 쏟아졌다. 이번 올림픽에서 단연 논란이 되었던 것은 성별 논쟁이 아닐까 싶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여자 복싱에 출전한 알제리의 이만 켈리프 선수와 타이완의 린위팅 선수가 있다.올림픽은 성별에 따른 신체적 역량의 차이를 고려해 모든 종목을 여자 부문과 남자 부문으로 나누고 있다. 두 선수 모두 지난해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국제복싱협회(IBA)로부터 자격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실격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올림픽 출전을 허가하면서 여러
400년 역사의 무등산수박이 멸종될 위기에 처했다. 조선시대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라갔다는 진귀한 이 수박은 기술이 발달한 현재도 ‘비싸서 못 먹는’ 음식의 대명사다. 20kg대 무등산수박 한 통이 50만원을 가뿐히 넘으니 그야말로 ‘과일계의 에르메스’라 불릴 만하다.무등산수박은 토종 수박으로 이 지역에서는 ‘푸랭이’라고 부른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등산 표고 300m 일대에서만 자란다. 무등산수박 씨앗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 심으면 일반 수박이 나온다고 한다. 무등산수박은 일반적인 수박과 한눈에 구별할 수 있다. 2~3배 큰 데다 특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CEO가 프랑스 파리에서 체포됐다. 이틀 뒤인 8월26일, 파리 검찰은 두로프가 받고 있는 혐의 12가지를 공개했다. 두로프가 텔레그램 CEO로서 해당 메신저를 통해 일어나는 아동 성학대, 마약 거래, 사기 등 각종 범죄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주장이다. 나흘간 심문을 받은 두로프는 출국 금지되고 일주일에 두 번 경찰서에 출석하는 조건 아래 보석금 500만 유로(약 74억원)를 내고 풀려났다. 파리 검찰은 두로프를 예비 기소하고 추가 조사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공교롭게 비슷한 시기, 국내에서도 텔레그램을 통해
지난주부터 텔레그램의 어뷰징 신고팀에 매일같이 이메일을 보내고 있다. 딥페이크 이미지를 자동으로 생성하는 텔레그램 봇 차단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텔레그램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 공개 봇에 대해 신고받으면 검토하여 차단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규정에 근거하여 신고 메일을 꾸준히 보내고, 주변의 지인들에게도 메일을 함께 보내달라 청했다. 메일을 넣기 시작한 지 열흘쯤 되었을 무렵 딥페이크 봇이 차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의 메일 때문인지 텔레그램과 방심위의 ‘핫라인 구축’ 덕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쁨
다 부수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 착취가 보도되기 수년 전부터 소위 ‘지인 능욕’이라는 범죄가 판을 쳤다. 딥페이크 성 착취는 범죄 피해를 당해도 당사자가 모를 수 있다. 알고 난 후에 수사기관을 찾아가도 수사에 진전이 있는 경우가 적어서 다른 디지털 성범죄에 비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고, 피해의 심각성 또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게다가 딥페이크 범죄는 N번방, 박사방처럼 직접 여성을 ‘성 착취’하는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더 쉽게, 가볍게 저질러졌다. 일반인은 물론 연예인까지 범죄의 타깃이 됐다.
“지금의 국회 상황이 제가 살아오면서 처음 경험하는 상황이다. (국회가) 좀 정상적으로 기능을 해야 되지 않겠나, 해야 할 본연의 일을 해야 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든다).” - 윤석열 대통령, 8월29일 국정 브리핑 기자회견“역대 국회 중 지금과 같은 국회를 본 적이 없다. 원체 비정상적인 국회다.” - 정진석 비서실장, 9월4일 대통령실 직원 전체 조회윤석열 대통령이 헌정사에 새 기록을 새겼다. 1987년 헌법이 개정된 이후 대통령이 국회 개원식(9월2일)을 찾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통령실은 국회, 특히 야당이 윤석열
MBC의 약진과 유튜브의 선전. 2024 〈시사IN〉 신뢰도 조사 언론 분야를 요약하는 키워드다. 가장 신뢰하는 언론매체를 묻는 질문에 MBC가 25.3%로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와 순위는 같지만 응답자 8.5%의 지지를 받은 2위 KBS를 큰 차이로 따돌렸다. 신뢰하는 매체로 유튜브를 꼽은 응답자(6%) 역시 늘어나 지난해 8위에서 3위로 순위가 크게 올랐다. TV조선(4.6%), JTBC(4.4%), SBS(4.1%)가 그 뒤를 이었다.MBC의 신뢰도가 높아진 시점은 공교롭게도 윤석열 정부 출범 시기와 일치한다. 윤 정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에 있는 안반데기는 여름철 여행 명소다. 탁 트인 하늘 아래 높은 지대에 시원하게 펼쳐진 푸르른 배추밭이 아름답다. 여름휴가로 동해 바다를 찾았던 여행객이 이곳에서 추억의 사진을 찍고 간다. 8월8일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이곳을 찾았다. 휴가차는 아니었다. 여름철 배추 수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6월과 7월에 이어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폭염 탓이다. 배추는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호냉성’ 작물이다. 생육 적정 온도가 18~20℃다. 여름철이면 기온이 낮은 태백·강릉·평창 등 강원도 고산지대에
7개월째다. 의료 현장에서도 이렇게 오랜 의료 공백은 예상하지 못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지키는 교수들은 “초반에는 단기간에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길어야 한두 달일 거라 생각하고 버텼다”라고 말했다.7개월 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2월6일 윤석열 대통령은 내년도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다(이후 1509명 증원으로 확정됐다). 22대 총선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당장 현행보다 65% 늘어날 신입생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대학의 우려와 필수·지역·공공의료 인력을 확보할 방안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충분히
“명절날 큰집에 온 거 같아요.”8월31일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마을 안에 희한한 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신술목학교. 신이 들어오는 길목이라는 뜻을 가진 이 명칭은 신산리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이날 학교 개교를 축하하고 고사를 지내기 위해 60여 명이 ‘학교’를 가득 채웠다. 성산 앞바다를 병풍처럼 두르고 사과와 배, 귤, 시루떡, 초, 뜨개 북어, 명주 실타래, 수제 막걸리 등을 올린 고사상이 차려졌다. 손님들은 돌아가며 절을 한 뒤 저마다 학교에 대한 바람과 번영을 기원하는 말을 고했다.고사를 지낸
‘모든 사람들은 명예심을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일이 몰려들 때마다 모두가 이를 해내기 위해 장대한 협주곡을 연주하는 노력으로 임했다. 모든 사람이 잘 짜인 각자의 일을 맡아 주도면밀하게 해내기 때문이다.’조지 오웰의 데뷔작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문학동네, 2016)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떤 현장일까? 파리의 호텔 주방이다. 오웰은 대용량의 음식을 제시간에 내놓는 건 “복잡하기 짝이 없”고 “생각보다 훨씬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라서 “때때로 우리는 인생이 단 5분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움직인다”라고 쓴다. 일하는 양
손석희 전 JTBC 대표이사는 MBC를 ‘고향’이라 지칭한다. 지난 7월 그가 11년 만에 고향을 방문했다. 총 5회 방영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이하 〈질문들〉)은 ‘우리 사회 각 분야의 고민거리를 인터뷰로 풀어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자영업, 저널리즘, 영화, 책, 노년을 키워드로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 유시민 작가, 최민식·윤여정 배우 등 각 분야 영향력 있는 당대의 인물들이 ‘손석희의 질문들’에 답했다. 모든 저널리즘의 시작이 인터뷰라는 그의 생각과도 맞닿아 있는 기획이다. MBC 〈100분 토론〉이나 〈JTBC 뉴스룸
역사는 뜨거운 현안이다. 발단은 지난 7월27일 유네스코의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다. 사도광산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강제 동원한 현장인데 일본의 전시 시설에는 ‘강제노동’이라는 문구가 빠졌다. 일본 언론은 한·일 정부가 사전 합의한 결과라고 보도했고, 한국 외교부는 ‘요구했으나 일본이 수용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8월6일 윤석열 대통령이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김 관장은 과거 1948년 건국론을 주장하고 백선엽을 옹호한 이력이 있다. 김 관장뿐만 아니라 근래 임명된 정부 산하 역사 연구기관 기관장
돌이켜보면 닭을 무지하게 먹었다. 조각 나 양념이 묻은 치킨, 야채와 당면에 덮인 찜닭은 살아 있는 닭과 상관없는 무언가였다. 경상도에서 자라며 지금껏 먹은 닭을 줄 세우면 못해도 동네 한 바퀴는 될 것이다. 비건 아닌 내가 갑자기 음식에 살아 있는 생명을 겹쳐 보게 된 배경이 있다. 그건 대구의 특징과도 관련 있다.대학 시절, 닭 요리는 싸고 접근성이 좋았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자주 친구들과 찜닭을 먹었다. 거짓말 좀 보태 대학가 한 집 건너 한 집에선 찜닭을 팔았다. 간장찜닭 중(中) 사이즈를 시키면 세 명이 배불리 먹었다.
추석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추석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 한 해 동안 고마웠던 이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때다.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땐 소소한 선물도 곁들인다. 가장 많이 선택하는 선물은, 옥천에서는 ‘옥천푸드’라고도 부르는 로컬푸드, 옥천산 농산물이다.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옥천에서는 어렵지 않게 옥천산 로컬푸드를 만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한국처럼 ‘유통’이 시장을 꽉 잡고 있는 (그래서 왜곡된)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게 아니다. 그나마 최근 몇 년 사이 로컬푸드 정책 확산으로 직매장이 보편화되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 2556번지. 이곳의 주인인 야생동물의 흔적을 따라 비좁은 산길을 오른다. 곳곳에 보이는 풍경은 빨간 역삼각형 경고판. 지뢰지대라는 뜻이다. 꼴딱 숨이 넘어갈 듯 한참을 오르면 이내 절경이 펼쳐진다. 저 멀리 왼쪽에 금강산, 그리고 등 뒤로는 설악산이다.한반도 남쪽의 최북단, 알알이 익어가는 고개 숙인 벼 사이로 북풍이 한기를 몰고 미리 찾아오는 강원도의 9월,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볼 무렵이면 실향민들은 이곳으로 와서 그리운 피붙이를 찾는다. 일찍 수확한 쌀로 정성스럽게 지은 밥, 농사지을 수조차
짜장 맛이 나는 우동일까, 우동 맛이 나는 짜장일까. 식당 사장은 ‘세 번은 먹어봐야’ 진미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단골손님들만 은밀하게 찾는 해장 음식이었고,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통영 사람들만 즐겼다던 그 음식, 바로 ‘우짜’다.우짜는 짐작하겠지만 우동짜장을 줄인 말이다. 우동에다가 짜장소스를 부어놓은 음식이다. 고명으로는 단무지·어묵·파·고춧가루·통깨·김가루가 올라간다. 쉬이 그 맛을 가늠할 수 없어서 외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반면 외지로 떠난 통영 사람들에게는 고향의 맛이다. 명절 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