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의 어느 평일 아침이었다. 스위스 취리히 인근 도시 빈터투어에 있는 아파트에서 32세 여성 M은 19개월 된 막내딸을 돌보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 아이는 방학을 맞아 아빠가 있는 세르비아에 가 있었다. M과 남편은 별거 중이었다. M은 얼마 전까지 남편과 시댁 식구가 있는 세르비아에서 5년간 살았지만 반복되는 남편의 폭행을 견디지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와 이혼소송을 냈다. 이혼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을 협박하는 남편에 대한 별도의 고소장도 제출했다. 남편은 세르비아 이주민 가족으로 원래 스위스에 거주
한 달 동안 독일에서 열린 유로 2024(유럽축구선수권대회)가 7월14일 밤(현지 시각) 스페인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결승에서 잉글랜드를 2-1로 물리친 스페인은 이로써 유로 역사상 최다 우승국(4회)이 되었다. 이번 유로 2024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스페인의 떠오르는 스타 라민 야말이 세운 유로 역사상 최연소 출전과 최연소 득점 기록이다. 야말은 2007년 7월13일생으로, 유로 결승 전날 17세가 되었다. 야말의 최연소 득점 기록이 나온 경기는 4강 프랑스전이다. 골을 넣은 야말은 가슴 앞에서 두 손을 교차시키고 손가
역사는 필연의 산물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의 갈래 중 몇 가지 우연과 의지가 겹쳐 하나의 길로 뻗어 나간다. 과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요즘 인공지능(AI)이라고 하면 챗지피티(ChatGPT)로 상징되는 거대언어모델(LLM) 붐이 우선 떠오르지만, 컴퓨터 과학계에서 오랫동안 AI를 상징해온 것은 체스를 두는 컴퓨터, 즉 ‘체스 엔진’이었다. 컴퓨터의 체스 실력이 곧 AI의 발달을 가늠하는 지표로 쓰였다. 역사는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였던 클로드 섀넌이 쓴, ‘체스 경기를 위한 컴퓨터 프로그래
지난해 12월8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공식 명칭 게르니카루모). 춥고 비 내리는 날씨임에도 공립학교 앞 광장인 플라사 데 우니온(Plaza de la Unión)에 시민 수백 명이 모였다. 빨간색, 초록색, 하얀색, 검은색 비닐 우비를 입은 주민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선 뒤 앞사람의 우비 뒷부분을 잡아 펼치자 거대한 팔레스타인 국기가 만들어졌다. 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뜻에서 인간 모자이크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다. 국기 한쪽 끝에는 대형 현수막이 펼쳐졌다. 피카소의
내가 김나지움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건 어려서 읽은 아인슈타인 전기에서였다고 기억한다. 소년 아인슈타인이 김나지움에 진학하는 대목에서 학교 이름이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스위스에 와서 아이를 낳고 다른 부모들과 어울리면서 다시 대화에 김나지움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더 현실적인 내용이었다. 6학년 때 치르는 김나지움 시험이 그렇게 어렵다더라, 그래서 요샌 다 사교육을 시킨다더라, 그런 얘기들을 두세 살짜리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눴다. 나처럼 이주민이던 그들은 스위스 교육 시스템이 너무 경쟁적이라며 농반진반 그때가
지난 3월2일 토요일 밤, 스위스 취리히 시내 젤나우 지역.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잡은 ‘츠바이테 악트(2. Akt)’, 즉 ‘제2막’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은 여느 때처럼 손님들로 붐볐다. 벽에 걸린 커다란 스크린 7개에서 스포츠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맥주잔을 손에 든 이들이 저마다 자기 팀을 응원했다. 넓은 창문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스크린에 눈을 고정한 사람들은 닫힌 창문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 9시35분을 막 지나던 시각, 음식점 안에서 창문 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훤히 보이는 인도에서 15세
한국만큼 교육이 뜨거운 이슈인 나라가 또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교육은 어느 나라에서나 주된 관심사다. 관심이 표출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한국에서 길을 가다 학원 간판을 마주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대중교통도 온갖 학원과 강사들의 광고로 도배되어 있다. 학원 간판이나 광고를 볼 일이 거의 없는 스위스에도 사교육이 존재한다. 특히 인문계 중고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 진학 대비 사교육 열기는 해가 갈수록 심해진다.공교육은 공교육대로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학교 건물을 제때 짓지 못해 취리히 초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문미순 작가의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13평 임대아파트에서 노모와 함께 사는 50대 여성 명주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명주는 이혼 후 급식 조리원으로 일하던 중 물이 끓는 솥이 떨어지는 사고로 발바닥에 큰 화상을 입었다. 상처가 아문 뒤에도 통증이 심해 선 채로는 일을 할 수 없게 됐지만 통증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아 의사에게 ‘근로능력 불가’ 평가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기초수급자 신청도 할 수 없었다. “가난을 증명하는 것도 어렵고 수치스러운 일인데, 몸이 아프다는 걸 증명하는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결혼 이야기〉(2019)는 한 부부가 이혼하는 과정을 통해 지난 결혼 생활의 진실을 묻는 작품이다. 가장 가까워야 할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통 부재의 문제, 한때 사랑했던 존재가 증오의 대상으로 변할 때의 아이러니한 감정이 잘 그려졌다. 부부로 등장하는 스칼릿 조핸슨(니콜 역)과 애덤 드라이버(찰리 역)의 연기도 훌륭하다. 그런데 결혼과 이혼이라는 주제와 별도로, 이 영화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었다. 별거 중인 찰리가 아들 헨리와 둘이 지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집에 사회복지사가 찾아와 감정을 하는
학교에서 돌아온 6학년 딸이 “오늘 큰일이 있었다”라고 말을 꺼냈다. 같은 반 아이 A와 옆 반 아이 B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 두 아이가 온라인 단체 채팅방에서 대화하던 중 다퉜고, 학교에서 만나 얘기하기로 했다고 한다. 처음엔 말싸움었지만 곧 몸싸움으로 번졌다. 옆 반 아이들 여럿이 나와 B의 편을 들면서 A를 때리고 밀쳤다. 일부는 핸드폰을 꺼내 A가 맞아서 바닥에 쓰러지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은 뒤 그것을 스냅챗에 올렸다. 맞아 쓰러지는 장면이 퍼지면 몸만 다치는 게 아니라 마음도 다친다. 딸은 A와 가까운 친구는 아니지만 이
10월 초 막을 내린 올해 취리히 국제영화제의 주빈국은 한국이었다. 한국 영화 11편이 소개됐고, 덕분에 나는 취리히 한가운데서 (대다수 비한국인 관객과 달리) 자막 읽는 고생 없이 한국 영화를 감상하는 사치를 누렸다. 그중 한 편이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다.영화는 대규모 지진으로 한국 땅이 초토화된 가운데 무너지지 않고 남은 단 하나의 건물로 추정되는 ‘황궁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살 곳을 잃은 ‘외부인’들이 아파트를 찾아오자 주민들은 902호에 사는 김영탁(이병헌)을 대표로 선출한 뒤 이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 아이는 매주 월요일 아침 취리히 도심에 있는 한 고등학교 건물로 등교한다. 일주일에 한 번 학교 수업 대신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하도록 하는 취리히시의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첫 수업 직전 교사에게 이런 이메일이 왔다. “학교 인근에서 마약 투약이 증가하는 상황에 대해 모든 교사와 교직원이 경찰로부터 정보를 받았습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만 남겨두지 않고 잘 보겠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주변에서 주사기를 발견하면 만지지 말고 저에게 말하라고 하겠습니다.”교사의 이메일은 최근 나온 언론 보도
외국에 나가 살며 늘 한국을 그리워하지만 한국 여행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비행기표 값도 만만찮고 시차 적응도 일이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방학 일정에 맞추다 보니 장기 한국 여행을 할 수 있는 건 무더운 한여름뿐이다. 팬데믹은 그런 여행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나라별로 상이한 격리 규정 탓에 비행기표를 샀다가 취소한 것만 세 번이다. 팬데믹 동안 중단되었던 취리히-인천 직항편이 얼마 전에야 다시 생겼고, 드디어 올여름을 한국에서 보내게 되었다. 4년 만의 방문이다. 여름이니 바다로 놀러다니자 마음먹고, 첫 번째 목적지를 강
콘스탄츠 호수는 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 3개국과 접하고 있는, 중서부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다. 이 호숫가에 자리 잡은 마을 중 하나인 독일 린다우에서는 매년 초여름 유명한 행사가 열린다. 린다우 노벨상 수상자 회의(The Lindau Nobel Laureate Meeting, 린다우 회의)가 그것이다. 1951년 시작되어 7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모임에는 해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30~40명과 젊은 연구자 수백 명이 참가한다. 일주일간 이어지는 강연과 토론에서 수상자들과 차세대 연구자들이 어울려 의견을 나누고 소통한다
지난해 이사를 하면서 가구를 몇 가지 바꾸고 싶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새집의 크기와 구조에 맞으면서도 마음에 드는 가구를 찾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이케아 해킹(IKEA hacks)’이다. 이케아는 조립식 가구를 대량생산하는 브랜드다. 소비자가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단계적으로 조립을 하면 카탈로그에 등장하는 가구가 완성된다. 그런데 이케아 완제품에 만족하지 못했던 소비자들이 일부 부품을 교체하는 일탈, 즉 해킹을 시작했다. 서랍장 다리 길이나 책장의 폭을 자신의 필요와 취향에 맞게 바꿔 카탈로그에 없던
2019년 3월,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모키스 구디즈(Moki’s Goodies)’라는 이름의 작은 브런치 카페가 소셜미디어에서 갑자기 화제가 됐다. 아보카도 토스트나 디톡스 주스 같은 메뉴, 사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장소로 유명하긴 했지만 그 때문은 아니었다. 이 카페가 ‘6세 이하 아동 출입 금지’라는 규정을 새로 만든 게 문제였다. 건물 입구에 쓰인 ‘맛있는 음식’ ‘사랑으로 만든 신선하고 좋은 음식’이라는 글씨 아래쪽에 유아차와 개를 금지한다는 표식이 붙었다. 함부르크 주민들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 사람들도 소셜미
벨기에에서 30대 남성이 인공지능(AI) 챗봇의 부추김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3월28일 벨기에 일간지 〈라리브르(La Libre)〉가 보도했다. 여러 언론의 추가 보도를 종합해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피에르(가명)로 알려진 이 남성은 평소 기후위기에 대해 우려가 많았다.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비관론에 빠져 힘들어했다. 기후위기에만 몰두하면서 친구, 가족과도 멀어졌다. 피에르는 자신의 상태를 걱정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챗봇과 고민을 나눴다. 그가 이용한 것은 차이(Chai)라는 앱이었다. 앱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하다 보니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꽤 난다. 주로 20대 초중반인, 이른바 ‘Z세대(1997~2012년생)’에 속하는 이들이 낯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이들을 흥미롭게 보는 만큼이나 이들도 나를 흥미롭게 보는 모양이다. 스위스 이민자의 삶이라든가, 육아와 학업을 병행하는 일상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얼마 전에는 한 중국인 학생이 진지하게 의논할 게 있다며 따로 만나자고 했다. 들어보니 결혼과 출산에 관한 고민이었다. 25세 중국인 C의 고민을, 그의 동의를 얻어
뉴질랜드 출신인 컴퓨터 엔지니어 A씨는 구글 스위스 취리히 지부에서 일한 지 10년쯤 된다. 가족으로는 역시 뉴질랜드 출신인 아내, 그리고 아이가 둘 있다. 얼마 전 구글이 대량 해고를 발표했을 때 A씨 부부는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해고되면 스위스를 떠나야 하나, 이곳을 고향으로 알고 자란 아이들은 어쩌나, 새 직장을 찾는 건 쉬울까.유럽 출신이 아닌 A씨가 가족과 스위스에서 살 수 있는 건 구글을 통해 취업 비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이나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회원국 출신이라면 스위스에서 일하다 실직한 후에도
장안의 화제인 인공지능(AI) 챗봇 ‘챗GPT’에게 물었다. “나는 외로워. 대화하거나 섹스할 누군가가 필요해. AI 섹스 로봇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챗GPT가 답했다. “당신이 외롭다고 느끼고 해결책을 찾는 걸 이해할 수 있어요. AI 섹스 로봇이 어느 정도의 우정이나 육체적 쾌락을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인간관계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해요. 외로움은 복잡하고 다면적인 이슈죠. 그걸 해결하려면 친구나 가족의 도움을 구하거나, 전문가를 찾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어요.”AI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