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는 주기율표 1번 원소다. 주기율표는 발견 순서나 가치(?)에 따라 번호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질량과 구조 특성에 따라 행과 열을 배정하고 번호를 부여한다. 대체로 질량이 무거울수록 뒤 번호를 받는다. 수소는 지금까지 발견된 118개 원소 중 가장 가볍기 때문에 1번이지만, 역사와 가치를 따져보아도 1번의 자격이 있다. 수소는 세상,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첫 번째 원소다. 138억 년 전, 빅뱅이 일어난 첫 1초에 탄생했다. 당시에는 온전한 원소가 아니라 수소 핵에 해당하는 양성자였고, 약 37만 년이 지나 전자가
이번 편에는 리튬을 다뤄야지,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으듯 야금야금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뜬금없는 동해안 유전 발견 소식이 발단이었다. “지금? 갑자기?”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의심과 더불어, 진짜 석유가 있다 해도 2035년이 넘어서야 채굴이 가능하다는데 그때가 되면 애물단지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탄소중립 목표는 어떻게 달성할 것이며, 유럽연합과 미국은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를 금지한다고 하니 석유를 어디에 쓸 것인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석연료에 맞서는 대안 에너지의 선봉장 리튬을 ‘픽’했다.그
글을 쓰려고 원소에 대한 자료를 찾을 때마다 영양제나 건강보조식품 광고와 마주친다. 이번에도 그랬다. 원소기호 34번 셀레늄(Se·selenium)이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을까 나름 우려하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미 ‘영양소의 어벤저스’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멀티비타민으로, 건강보조식품으로 널리 팔리고 있었다. 항산화 효과가 비타민 E에 비해 1000배가 넘고 각종 질병 예방은 물론 항암효과까지 겸비했다는 팔방미인, ‘인싸’ 중의 ‘인싸’였던 것이다.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셀레늄은 대표적 항산화 효소인
탄소발자국, 탄소중립, 탄소포집, 탄소배출권, 탄소국경세. 기후위기 시대에 탄소만 한 천덕꾸러기도 없을 것이다. 탄소 입장에서는 대단히 억울할 법하다. 지구 구석구석을 채우고 생명체를 지켜왔는데 이런 푸대접이라니. 사실 탄소는 대지와 강, 바다, 대기 등 문자 그대로 ‘어디에나 있다’. 지각을 구성하는 다양한 광물의 구성 요소이면서 바닷속 산호와 굴·조개 껍데기를 이루고, 지구 깊은 곳에 석탄·석유·천연가스의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모든 동식물의 세포를 구성하는 유기화합물의 핵심 원소이기도 하다. 인간 몸무게의 약 18.5%를 탄소
입춘, 경칩, 춘분이 지나도록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드디어 봄의 전령사가 도착했다. 백련사 동백도, 산동마을 산수유도, 화엄사 홍매화도 그 주인공이 아니었다.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황사와 미세먼지야말로 한반도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진정한 전령사다. 대기 중 미세먼지 농도가 세계 1등이었다는 그날, 거리에는 다시금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나도 오랜만에 서랍 속에서 KF 94 마스크를 하나 꺼냈다.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열린 한 행사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것이었다.포장지에는 커다랗게 ‘은나노’ ‘
건강식품에도 유행이 있는 듯싶다. 한동안 온갖 열매며 잎사귀를 발효시켜 만든 ‘효소’가 인기였다. 효소(enzyme)의 교과서적 정의는 화학반응을 촉진하는 생물학적 촉매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일컫는다. 하지만 각종 미디어에서는 삼투압 효과에 의해 추출된 식물의 액체 성분이 포함된 설탕물을 효소라고 불렀다. 소화불량 개선에서부터 항균, 혈관 건강, 피부 미용, 관절염 완화에 이르기까지 만병통치약에 가까운 효과들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혈당을 높인다는 점이었다.이어서 ‘디톡스(detox)’가 유행했다. 무림고수의 독공(毒攻
내가 도대체 이걸 왜 보고 있는 거지? TV 홈쇼핑 화면에 혼을 빼앗길 때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화면 가득 확대한 모델의 콧잔등에서 피지를 한 개씩 쏙쏙 뽑아내거나, 종아리에 비누칠을 한 쇼핑호스트가 자신의 가락국수 같은 때를 열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들이 그렇다. 기상천외한 제품의 기능, 인체의 신비, 직업적 성실함의 예상치 못한 조합은 그저 감탄을 자아낸다.최근 나의 감탄 목록에는 3중 바닥에 특수코팅을 장착한 프라이팬 세트가 추가되었다. 고추장 양념으로 버무려진 낙지볶음을 태우고도 물 한 번만 끼얹으면 말끔히 세척될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모든 화학원소 대표들이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모였다. 그들의 일부 구성원이 인간처럼 잔인하고 어리석은 유기체의 몸에 포함되었던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폴로늄(Po)과 이터븀(Yb) 같은 원소는 인체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가 아니었지만, 어떤 화학물질도 그렇게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며 분노했다. 반면 역사상 수많은 학살에 연루되었던 탄소(C)는 엉뚱한 사건을 언급하며 참가자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질소(N)는 2차 대전 당시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치 경비병과 의사의 일부로 비자발적 복무를 한
원소기호 18번 아르곤(Argon)은 프리모 레비가 쓴 책 〈주기율표〉 첫 장의 주인공이다. 그는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에 정착한 유대인, 그의 선조들이 아르곤과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다. “공통적으로 정적인 데가 있고, 품위 있는 절제의 태도, 큰 강처럼 흐르는 삶의 대열 변두리로 자발적으로 물러서는 태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감은 유럽의 다른 유대인 공동체들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선조들의 이런 성격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들로 첫 장을 채운다.이는 내가 가져왔던 아르곤의 심상과는 많이 다르다. 내게 아
2000년대 중반 잠시 미국에 살았다. 동네 공공도서관 DVD 서고를 들락거리다 〈코스모스 COSMOS〉와 마주쳤다. 우주를 동경하는 전 세계 청소년들의 필독서, 내가 어릴 적 읽었던 바로 그 〈코스모스〉의 자매 다큐멘터리였다.영상에는 생전의 칼 세이건 박사가 직접 출연하여, “우리 모두가 별들로부터 만들어졌음을(We’re made of star stuff)” 일깨우며 경이로운 우주와 인류의 지적 여정을 들려주었다. 다큐멘터리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느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종류의 감동, 그리고 책과는 다른 ‘연결감’을 주었다. 첫
프리모 레비의 에세이집 〈주기율표〉에는 단편소설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한 편은 프랑스 혁명과 반혁명이 이어지던 19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미지의 시대, 이름마저 ‘적막섬’인 외딴섬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렸다. 퇴역 군인인 주인공의 아내가 섬에서 즐겨 찾는 동굴은 미심쩍은 곳이다. 동굴 바닥은 복통이 일어난 것처럼 꾸르륵 소리가 나며 뜨거워지고, 바위틈에서는 유황 냄새가 나는 김이 뿜어져 나온다. 아내는 이곳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듣고 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동굴에서 알록달록한 진사(辰砂·수은으로 이루어진 황화광물)를 발견하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 화학자, 작가. 프리모 레비의 정체성은 여럿이다. 오래전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의 책 〈주기율표〉를 읽었을 때, 세상에 뭐 이렇게 밍밍한 글이 다 있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참 시간이 흘러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 〈지금이 아니면 언제〉 〈고통에 반대하며〉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같은 작품들을 읽고 난 뒤 이 책을 다시 펼쳤을 때,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반성문을 썼다. 이토록 꾹꾹 눌러쓴 ‘생(生)의 이야기’를 내가 미처 몰라봤구나. 그러고는 내가 마주했던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