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역사의 무등산수박이 멸종될 위기에 처했다. 조선시대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라갔다는 진귀한 이 수박은 기술이 발달한 현재도 ‘비싸서 못 먹는’ 음식의 대명사다. 20kg대 무등산수박 한 통이 50만원을 가뿐히 넘으니 그야말로 ‘과일계의 에르메스’라 불릴 만하다.무등산수박은 토종 수박으로 이 지역에서는 ‘푸랭이’라고 부른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등산 표고 300m 일대에서만 자란다. 무등산수박 씨앗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 심으면 일반 수박이 나온다고 한다. 무등산수박은 일반적인 수박과 한눈에 구별할 수 있다. 2~3배 큰 데다 특
“명절날 큰집에 온 거 같아요.”8월31일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마을 안에 희한한 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신술목학교. 신이 들어오는 길목이라는 뜻을 가진 이 명칭은 신산리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이날 학교 개교를 축하하고 고사를 지내기 위해 60여 명이 ‘학교’를 가득 채웠다. 성산 앞바다를 병풍처럼 두르고 사과와 배, 귤, 시루떡, 초, 뜨개 북어, 명주 실타래, 수제 막걸리 등을 올린 고사상이 차려졌다. 손님들은 돌아가며 절을 한 뒤 저마다 학교에 대한 바람과 번영을 기원하는 말을 고했다.고사를 지낸
돌이켜보면 닭을 무지하게 먹었다. 조각 나 양념이 묻은 치킨, 야채와 당면에 덮인 찜닭은 살아 있는 닭과 상관없는 무언가였다. 경상도에서 자라며 지금껏 먹은 닭을 줄 세우면 못해도 동네 한 바퀴는 될 것이다. 비건 아닌 내가 갑자기 음식에 살아 있는 생명을 겹쳐 보게 된 배경이 있다. 그건 대구의 특징과도 관련 있다.대학 시절, 닭 요리는 싸고 접근성이 좋았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자주 친구들과 찜닭을 먹었다. 거짓말 좀 보태 대학가 한 집 건너 한 집에선 찜닭을 팔았다. 간장찜닭 중(中) 사이즈를 시키면 세 명이 배불리 먹었다.
추석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추석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 한 해 동안 고마웠던 이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때다.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땐 소소한 선물도 곁들인다. 가장 많이 선택하는 선물은, 옥천에서는 ‘옥천푸드’라고도 부르는 로컬푸드, 옥천산 농산물이다.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옥천에서는 어렵지 않게 옥천산 로컬푸드를 만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한국처럼 ‘유통’이 시장을 꽉 잡고 있는 (그래서 왜곡된)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게 아니다. 그나마 최근 몇 년 사이 로컬푸드 정책 확산으로 직매장이 보편화되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 2556번지. 이곳의 주인인 야생동물의 흔적을 따라 비좁은 산길을 오른다. 곳곳에 보이는 풍경은 빨간 역삼각형 경고판. 지뢰지대라는 뜻이다. 꼴딱 숨이 넘어갈 듯 한참을 오르면 이내 절경이 펼쳐진다. 저 멀리 왼쪽에 금강산, 그리고 등 뒤로는 설악산이다.한반도 남쪽의 최북단, 알알이 익어가는 고개 숙인 벼 사이로 북풍이 한기를 몰고 미리 찾아오는 강원도의 9월,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볼 무렵이면 실향민들은 이곳으로 와서 그리운 피붙이를 찾는다. 일찍 수확한 쌀로 정성스럽게 지은 밥, 농사지을 수조차
짜장 맛이 나는 우동일까, 우동 맛이 나는 짜장일까. 식당 사장은 ‘세 번은 먹어봐야’ 진미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단골손님들만 은밀하게 찾는 해장 음식이었고,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통영 사람들만 즐겼다던 그 음식, 바로 ‘우짜’다.우짜는 짐작하겠지만 우동짜장을 줄인 말이다. 우동에다가 짜장소스를 부어놓은 음식이다. 고명으로는 단무지·어묵·파·고춧가루·통깨·김가루가 올라간다. 쉬이 그 맛을 가늠할 수 없어서 외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반면 외지로 떠난 통영 사람들에게는 고향의 맛이다. 명절 때면
2020년 가을 경남 창원시에서 배성도씨를 만났다. 옷소매에 한국지엠 로고가 새겨진 칼라 티셔츠를 입고 있던 모습이 선연하다. 그가 맡은 직책은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지회장이었다.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585명은 2019년 12월31일부로 해고당했다. 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결연한 의지와 막연한 심정을 교차하여 내비쳤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일단 여기저기 계속 뛰어다녀보는 거죠. 그런데 저도 생계가 어려워지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얼마 전 신문에서 배성도씨를 다시 봤다. 비정규직
옥천에 처음 발을 디딘 2010년 11월의 어느 날, 옥천읍 시가지에서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군데군데 인도가 끊긴 도로. 쌩쌩 달리는 자동차를 피해 온몸을 구기듯 움츠린 채 걷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사람이 살지?” 자연스레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런 데서 어떻게 살라는 거지?’ 싶은 도로‧교통 환경을 마주하게 된다.언제든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모빌리티의 천국이 도래한 듯하지만, 여전히 그 이면에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이동권의 최전선에서 싸워온 장애인의
7월21일 접경지역 일대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이 6년 만에 전면 가동되더니 7월24일에는 대통령실 청사 일대에 ‘오물 풍선’까지 떨어졌다. 한반도의 평화시계가 또다시 빠르게 뒤로 돌자 분쟁 양상으로 치닫는 상황을 여러 사람이 비판하고 나섰다. ‘맞대응’을 하겠다고 나서는 언동 역시 놀랍지 않은 풍경이었다.분쟁과 설전, 비판이 오가는 동안 그저 숨죽이는 곳, 그리고 주된 관심에서도 비켜나 있는 삶이 있다. 강원과 경기 일대에 분포한 접경지역, 그리고 이곳에서 사는 주민의 삶이다. 한국전쟁 이후 숱한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접경지 주
집 앞 버스정류장에 ‘대구와 경북이 통합하면 한반도 제2의 도시가 됩니다’라고 적힌 선전 포스터가 붙었다. 동대구역 대형 입간판, 주요 사거리 현수막, 지하철 광고판에도 큼지막하게 붙었다. 포스터 속 빨간색으로 칠해진 대구·경북은 파란색의 서울·경기를 눌러버릴 듯 위상을 뽐내고 시민들은 그 앞을 무심한 얼굴로 지나간다.홍준표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2026년 지방선거에서 대구·경북 통합 단체장 선출을 목표로 행정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사실상 시도 의회 의결만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계획이다. 선두에 선 홍 시장은 대구시와 경북도
“그런다고 그 물이 맑아지나? 여기가 원래 아무리 가물어도 논바닥이 마르지 않는 ‘잉어배미’였다니까. 이게 연못이 아니라 옛날 논에 있던 둠벙(웅덩이)이야.”충북도청 본관 앞 동서 정원에 있는 연못을 두고 ‘문화동 터줏대감’들이 입에 달고 사는 소리다. ‘배미’는 논을 일컫는 말이니 잉어배미는 잉어라는 이름을 가진 논이다.이원종 전 충북도지사(민선 2·3기)는 이 연못의 수질을 관리하기 위해 측근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황토를 뿌리고 수초도 심었다.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커다란 천을 깔았지만 뿌연 흙탕은 가시지 않았다. 이시종 전 충
“140만 광주에 복합쇼핑몰 세 개가 웬 말이냐.” 6월26일 광주광역시청 앞에 광주상인연합회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명서 낭독으로 시작한 이들의 행동은 삭발과 도보 행진으로 이어졌다.이들의 요구사항은 명확했다. 복합쇼핑몰 둘 이상 입점은 안 된다는 것. 광주에서는 ‘더현대 광주’ 입점, 광주신세계백화점 확장, ‘그랜드 스타필드 광주’ 조성, 이렇게 3개 사업이 동시 추진 중이다. 복합쇼핑몰과 백화점, 아웃렛 등은 법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최근에는 편의상 다양한 업태의 소매업체를 한 곳에 모아 놓은 대형 상업시설을 복합
경남 산청군이 ‘또’ 지리산케이블카 사업을 추진한다. 6월19일 경남권역 지리산케이블카 입지선정위원회에서 산청군 노선을 단일 노선으로 선정했다. 경남권역 지리산케이블카 사업은 2011년부터 산청군과 함양군이 유치 경쟁을 벌여왔다. 산청군 노선은 산청 중산리에서 장터목대피소까지 4.38㎞ 구간이다. 환경부는 그간 사업 불허 이유 중 하나로 ‘지역 간 사업 중복’을 들어왔다. 이번에는 경남도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선 모양새다. 경남도는 산청군 노선안을 환경부에 제출하고 인허가를 요청할 예정이다. 6월20일 ‘노선 단일화 결정’을
2023년 7월15일 충북 청주시 오송읍의 궁평2지하차도가 폭우로 침수돼 14명이 사망했다. 곧 1주기가 되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과제는 더디기만 하다. 1주기에 맞춰 오송 참사 유가족·생존자 구술 기록집이 발간될 예정이다. 충북 청주 등지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도 이어진다. 7월8~15일 도보 행진과 추모제가 개최된다. 이 글은 구술 기록을 위해 만난 한 피해자 어머니에게 띄우는 편지다. 솔직히 고백할게요. 약속 장소에서 당신을 보고는 (잠시 당황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더랍니다. 본래 그날은 당신이 아닌
강릉에서 평창에 걸친 대관령 일대, 한반도의 척추를 가로지르는 강원 산간지역에 지난 5월15일 갑작스러운 눈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아닌 ‘화이트 석가탄신일’에 농민도, 이웃들도, 재난 당국도, 모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끝없는 산자락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대관령 산간지방 일대는 배추와 무 주산지이자 이른 봄이면 산나물 농사가 한창인 곳이다. 눈이 내리던 그 전날까지도 이곳에서는 봄을 맞아 산마늘과 곰취, 두릅 농사가 한창이었다. 파릇파릇하던 산나물 잎은 5월 중순에 내린 폭설로 모두 까맣게 죽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어쩔 도리 없는 이들이 공장, 크레인, 빌딩 위로 올라간다. 1월8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 옥상에 노동자 두 명이 올라갔다. 지상에 남은 노동자들도 구미와 평택 공장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엔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던 사건인데 당사자들이 몸으로 뉴스를 만들어냈다. 그마저도 고공 농성 6개월 차에 접어들며 다시 잠잠해진 분위기다.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외국인 투자기업(외투기업)이다. LCD 편광필름 생산업체로 일본계 다국적기업 니토덴코그룹이 100% 지분을 갖고 있다. 2003년 구미4국가산업단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