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자를 취재하면서, 내 앞에 마주한 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쩌다, 왜, 그 뒤 어떻게’ 따위의 질문을 던져야 해서다. 사기 피해를, 게다가 전세사기처럼 쉽게 ‘개인의 잘못’으로 취급되는 피해를 털어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물을 수밖에 없다. 더 구체적으로 알려야,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어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세사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왜 문제적인지 알기 위해 꼭 필요한 책이다. 부제인 ‘91년생 청년의 전세사기 일지’처럼 한 개인의
인터넷 서점에서 ‘엄마표’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본 적이 있다. 도대체 ‘엄마표 영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해본 일이다. 엄마표 영어와 관련된 책이 가장 많았고, 엄마표 과학, 엄마표 종이접기도 있었다. ‘아빠표’도 검색해보았다. 어쩐지 육아에 관한 한 엄마와 비슷한 책임이 있어 보이는 아빠에 관한 상상력은 빈곤했다.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를 읽으며 당시 생각이 났다. 저자가 ‘부모라는 기계적 중립의 단어를 버리고 엄마를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를 쓰고자’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조기 진통으로 임신 29주 만에 세상에 나온 저자의 아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오쩌둥 정신’을 언급할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마오쩌둥은 외국의 자본은 물론 과학기술까지 거부하는 ‘중국식 제조 시스템’으로 미국을 추월하겠다고 설치다가 수천만 명의 아사를 초래한 사람이다. 농촌에 인민공사(토지와 농기구를 공유하고 식사도 공동 식당에서 해결)를 설치하고, 수많은 지식인들을 외국 스파이로 몰아 잔혹하게 숙청했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주자파(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세력)로 낙인찍혀 박멸당했다. 그러나 시진핑 치하의 중국은 사실상 자본주의 대국으로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격심한 나라
열대야의 밤에 이 글을 쓴다. 온난화로 날씨 변동이 심각해지면서 기후위기 관련 서적과 정보는 넘쳐나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냉소적인 비관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고, 승용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기후위기에 관해 크게 두 가지 담론이 대립한다. 하나는 지금처럼 살면서도 제도(탄소세 등)와 기술(탄소포집 등)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른바 ‘탈성장’을 통해 생태와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의 이윤 활동을 금지하고, 물질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곱씹을수록 무서운 말이다. 뜻밖의 사고로 갑자기 죽으면 비명횡사라 부른다. 그러나 병사(病死)도 그 못지않은 비극이다. 경제적 부담과 두려움, 때로는 고통 자체 때문에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환자도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료 조력 사망 논쟁은 우리 모두가 연관된 문제다.저자 다이앤 렘은 1936년생 언론인이자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다. 2014년 파킨슨병에 시달리던 그의 남편은 열흘간 자발적으로 섭식을 중단해 생을 마감했다.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다이앤 렘은 존엄사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워싱턴포스트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못 마신다.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새빨개지고 쿵쾅쿵쾅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괴롭다. 그 덕분에 즐겨본 적도, 취해본 적도 없다.〈광인〉은 작품 전체에서 위스키 향이 뿜어져 나온다. 위스키와 예술이 주요 모티프다. 읽다 보면 멀리하는 술을 기꺼이 마시고 싶게 한다.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고즈넉한 위스키의 맛과 향, 혀끝에 남는 여운에 대한 간결하고 명확한 묘사는 몰랐지만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에도 빠뜨린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침이 고일 것 같다.작품 곳곳에서 챗
최근 몇 년 사이 ‘장마철’ ‘폭우’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누군가 “비가 무섭게 온다”라고 말하면, 실제로 물리적 공포를 느낄 만큼 ‘무섭게’ 비가 쏟아지는 상황이라는 걸 모두가 안다. 하지만 2023년 7월15일, 충북 청주시에서는 ‘무섭게’라는 단어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이미 사흘간 500㎜ 넘는 비가 내린 상황이었다. 궁평2지하차도로부터 불과 500m 떨어진 미호강이 범람하고 있으니 차량 출입을 통제해야 한다는 신고가 여러 차례 들어왔지만, 아무도 통행을 막지 않았다. 오전 8시27분부터 지하차도에 유입되기 시작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자들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어.” 드라마 〈돌풍〉에서 배우 설경구가 읊은 대사다. 드라마는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의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생)’ 집단이 위선적이고 타락했다고 비판한다. 용기 있는 문제 제기이긴 하지만, ‘한때 정의로웠던 인물들이 변했다’는 설정만 있을 뿐 인간 존재들의 구체적인 고뇌와 기쁨과 좌절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공허하다.〈돌풍〉을 비롯한 한국 정치 드라마의 납작한 현실 재현에 아쉬움을 느꼈다면 이 책을 펼쳐보길 권한다(물론 드라마와 무관하게 추천하는 책이
시절이 하 수상할 때 좋은 이야기를 찾고 싶어진다. 전쟁과 극우가 휩쓸고 있는 것 같은 암울한 세계지만 그래도 어딘가엔 자그마한 희망이 있길 바란다. 그저 덧없는 바람만은 아닌 게, 최근 만난 한 출판인은 북미에서 발행된 훌륭한 책들이 트럼프 시대와 ‘맞서며’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적대와 분열만이 전부가 아니다. 성차별과 반이민, 극단주의에 일종의 반작용처럼 저항의 서사들이 공동체 어딘가에 쌓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기력하지만은 않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때로 모두를 구하는 이야기가 되기도 하니까.〈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도
저자 전현우는 인천에서 출발해 회의가 잡힌 서울시립대로 향하는 출근길을 첫 번째 편지에서 시시콜콜 털어놓는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을 살피는 장면부터 지하철을 타고 서울 동대문구로 향하는 2시간의 여정을 눈으로 따라가며 흡사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오는 줄 알았다. 일행 중 그 누구보다 일찍 집을 나왔지만, 이미 지각은 예정된 수도권 거주자로서 애꿎은 지하철을 향해 ‘철마야 달려라!’ 수없이 되뇌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도시생활자가 겪는 통근·통학·이동이라는 고통은 개별적일지라
2019년에 전세사기 기사를 처음 쓰기 시작했다. ‘전세사기’라는 용어조차 낯선 시기였다. 당시 취재하며 만난 변호사들의 비관적인 시선을 기억한다. “전세는 채권채무 관계니까 돌려주지 못한다고 사기라 볼 수 없어요.” “전세는 원래 그런 거예요.” “임차인이 뭘 몰랐네.”5년이 지난 뒤 사정은 바뀌었다. 더러는 새로운 법률서비스 시장 개척에 환호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까치산역 일대에는 ‘전세사기 전문’을 자처하는 변호사 광고가 붙어 있다.두 저자는 흔히 ‘1세대 전세사기 사건’으로 불리는 ‘화곡동 강씨’ 피해자들의 변호인이
어떤 이들은 단편소설 읽기를 어려워한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거나, 고작 ‘장면’을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냐는 감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런 이에게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이었다. 카버 다음은 누가 좋을까? 오랫동안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는데 마침내 말할 수 있게 됐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쓴 앤드루 포터다.단편집의 첫 작품 ‘구멍’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구멍은 탈 워커네 집 차고로 이어지는 진입로 끄트머리에 있었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 있지만, 12년 전 여름, 탈은
제목부터 엄청나게 도발적인 이 책은, 현 세태를 에둘러 비판하는 법이 없다. 비판 대상은 이른바 ‘워크(woke)’라는 이들인데,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깨어 있기’ 또는 ‘깨시민’쯤이 되겠다.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PC주의)’을 무기로 삼는 워크에게 저자 수전 니먼은 “너희는 좌파가 아니다”라고 평가 내린다. 다른 말로는, ‘좌파라는 이름’을 워크에게 양보할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수전 니먼이 말하는 ‘좌파’는 무엇이길래, 워크에게 그 단어를 내줄 수 없다고 말하는가? 그가 말하는 ‘좌파’의 조건은 크게 세 가지다. 부족
정치팀 기자의 일상은 ‘질문’을 생각하는 일로 채워져 있다. 백브리핑(회의 뒤 질의응답)에서, 오찬(점심)에서, 전화 통화에서 도대체 무엇을 물을 것인가? 당장의 현안에 대한 입장을 부랴부랴 묻고 나면, 가끔은 허탈해진다. 스스로가 지금 공동체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등 중에서 여야 의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안은 손에 꼽힌다. 지금의 정당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들을 충실하게 다루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하기 어렵다.민주주의에서 갈등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
사회과학 분야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1쇄를 소중히 여긴다. 당장 읽지 않아도 쟁여야 한다. 1쇄를 마지막으로 절판되는 책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냉전의 마녀들〉 역시 그런 마음으로 ‘무지성 구매’한 책 중 한 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정말 좋아하게 된다. 왜 아니겠는가. 1951년, 18개국에서 온 각국의 최고 엘리트 여성 21명이 한국전쟁 진상조사를 위해 유서까지 미리 쓰고 보낸 약 열흘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인데. ‘국제민주여성연맹 한국전쟁 조사위원회’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단체였고, 무엇보다 이야기의 주인
‘1997년생. 20여 년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 안온 작가의 프로필 첫 두 문장이다. 하루빨리 돈 버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던 그는 글을 쓰고 싶었으나 스무 살 이후 글쓰기보다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그 가난하고 지난한 날에서 지나간 불온을 기록하고자’ 책을 썼다.지나간 불온은 작가의 손에서 생생한 현재가 된다. 기억은 멸균우유에서 시작한다. 학교에서 그에게 멸균우유를 주었다. 실온 보관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복지 대상 아동을 향한 배려였으나 ‘주는 방식에는 배려가 없었다’. 공개적으로 번호가 불리면 교무실
은행 예금에서 신용카드, 자동차 대출, 주택담보대출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금융거래에는 어김없이 이자가 붙는다. 그 이자들은 기준금리를 따라 같은 방향으로 오르내린다. 이것부터가 참 이상한 현상이다. 혹시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변동시킬 때 사회의 그 많은 전주(錢主)들에게 ‘나를 따라 금리를 올리거나 낮추라’고 겁박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어떻게 보면 기준금리란, 시중은행들‘끼리’ 돈을 빌리고 빌려줄 때 그 수준(기준금리)의 이자를 상호 간에 내도록 유도하겠다는 중앙은행의 선언이다. 시중은행들은 동업자들에 대한 이자를
‘다크투어’라는 용어가 있다. 전쟁과 학살, 재난처럼 공동체가 겪은 아픈 기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다. 사람들은 비극적인 역사를 잊지 않고, 또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 현장을 찾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서울 ‘다크투어’ 안내서다. 경의선숲길과 용산, 아현, 청계천, 종로 등 눈 감았다 뜨면 새 빌딩이 들어서는 서울 곳곳에서 쫓겨나고 밀려난 사람들을 기록했다.서울에 새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서는 건, 동시에 그곳에 뿌리내린 누군가를 들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눈물 자국이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마다
주장과 주장이 부딪치는 세상에서 믿을 건 숫자뿐이라지만, 그 또한 믿을 게 못 된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숫자가 다르고, 보수와 진보의 숫자가 다르다. 이를 보고 있자면, 누군가 논쟁적인 데이터를 완벽하게 검증해 ‘이것이 팩트다’라고 정리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체코 출신 캐나다 과학자인 바츨라프 스밀은 그런 위상에 가까운 인물이다. 통계분석의 대가인 그는 식량, 인구, 환경, 에너지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인류 문명사를 통찰하는 연구를 해왔다. 국내에서는 빌 게이츠가 가장 신뢰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숫자는 어떻게 진
마사 누스바움은 세계적 법철학자다. 미국 시카고 대학 로스쿨 교수인 그는 고전철학·정치철학·윤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독창적 저서를 냈다. 2021년 〈교만의 요새〉 서문에서 누스바움은 썼다. “나 역시 여성이다. 우리 사회의 다른 많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성희롱과 성폭력 피해자이기도 하다.”누스바움이 보기에 미국은 성평등 혁명을 겪고 있다. ‘미투 운동’ 이후 이 혁명이 어떤 진전을 이뤄왔는지 논하는 게 책의 첫 번째 목표다. 두 번째 목표는 오랫동안 특권을 누려왔고 지금은 개혁에 반발하는 이들의 논리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 밑바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