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라는 부제를 단 르네 피스터의 〈잘못된 단어〉(문예출판사, 2024)에는 다음과 같은 ‘취급주의’ 문구가 붙어 있다. “책의 일부 사례는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구호로만 그치는 ‘정치적 올바름’이 아닌, 현실적인 변화를 이끌 방안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꼭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송채경화 〈한겨레〉 기자).”PC로 줄여 쓰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인종·성별·종교·성적 지향·장애·직업 등과 관련
1917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시온주의 운동가들은 중동 전역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에 협력하면서 유대 국가의 기반을 쌓았다. 더 많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유입시키고, 그들만의 경제권을 만들고, 무장력을 키웠다. 라시드 할리디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열린책들, 2021)에 이렇게 썼다. “영국인들이 1948년 팔레스타인에서 떠났을 때, 유대 국가기구를 새롭게 창조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수십 년간 영국의 보호 아래 그런 기구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23년 10월7일, ‘하마스’로 약칭되는 이슬람 저항 운동(Islamic Resistance Movement)이 알아크사 홍수 작전을 개시했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에 이스라엘판 ‘진주만 기습(1941)’ 또는 ‘9·11(2001)’이라는 의미를 붙이고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을 ‘전쟁범죄화’하는 선전전을 펼쳤다. 세 사례는 비슷해 보이지만, 군국주의 국가 일본과 이슬람 국제 무장세력 알카에다에 일격을 당했던 미국은, 팔레스타인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이스라엘과 달리, 일본인이나 아랍계 무슬림을 지구상에서 말살하려 한 인종주의 국가가 아니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소설이 있다. 최근에 읽은 클레어 키건의 소설 두 권이 그랬다.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지만 읽고 나서도 할 말이 없다. “문장이 정교하네요”(네네), “시적이에요”(네네).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이런 감상이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소설은 최악의 소설이다(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독자도 소설 독자로서는 최악이다). 반면 욘 포세의 〈샤이닝〉(문학동네, 2024)은 키건의 소설처럼 빤한 이야기이지만,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정도는 벗어났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수다를 떨게 된다. 어떤 소설은 삶과
위기는 과거가 순간적으로 부정되고, 정지되고, 혹은 폐기되는 순간이자 미래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순수한 잠재력의 순간이다. 위기는 관습적으로 이어져온 그동안의 정상 상태에 대한 의문을 허용하기 때문에,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실험뿐 아니라 정치적 변혁이 생겨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위기가 항상 바람직한 변화만을 낳지는 않았다. 금융위기 사태를 맞은 한국에서는 민영화와 시장개방이 날치기로 이루어졌고, 2019년 코로나19 팬데믹은 ‘비대면’을 핑계로 정부가 그동안 해온 여러 종류의 대면 서비스를 소리 소문 없이 종료시켰다
1994년 한국을 방문했던 프랑스 대학생 발레리 줄레조는 서울에 있는 아파트 단지의 규모에 충격을 받고, 한국의 아파트 단지를 박사논문 주제로 잡았다. 그녀는 논문을 준비하는 5년 동안 프랑스의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했다. 프랑스에서 아파트 단지에 대한 연구는 이미 낡아서 새로울 것이 없는 주제가 된 지 오래인데, 뭐 하러 그 먼 나라에까지 가서 쓸데없는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에 상응하는 프랑스 단어를 찾을 수 없었던 발레리 줄레조는 답답했어요.프랑스에서 아파트 단지를 일컫는 용어는 ‘그랑땅상블(
모니카 마론은 〈슬픈 짐승〉(문학동네, 2010)의 화자이자 여주인공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작가의 이름을 따서 편의상 M이라고 부르게 될 그녀의 현재 나이는 100살이다. 동베를린에서 자라난 그녀는 스무 살 무렵에 결혼하여 약 20년간 결혼 생활을 했으며 다 큰 딸 하나를 두었다. M은 40대 때인 어느 날, 원인 모를 발작으로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구급차로 병원까지 옮겨졌다가 정신을 회복하고 집으로 돌아온 M은 스스로에게 “만일 그때 내가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고 묻고, 이렇게 대답했다. “
1980년대부터 수많은 정치인과 학자들이 잇달아 ‘계급의 종말’을 선포했다. 대물림된 사회 분화의 표식인 계급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고,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기초한 ‘계급 없는 사회’가 열렸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높은 경제성장률, 공교육의 대대적인 확대, 생활수준의 꾸준한 향상이 일어났다. 그 결과 노동계급에서 전문직으로 상향 이동한 사람이 급격히 증가했다. 그런데도 ‘계급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통념을 뒤집는 사회학 연구는 오히려 더 자주 나온다. 샘 프리드먼·대니얼 로리슨의 〈계급 천장〉(사계절, 2024)도 그 가
〈철학과 국가〉(빈서재, 2024)는 도쿄제국대학에서 첫 번째로 철학을 전공한 학생이자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첫 번째로 교수가 된 이노우에 데쓰지로(1855~1944)의 논문 선집이다. 그는 두 가지 업적으로 일본 현대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하나는 천황제 가족국가의 이념적 틀을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주창한 ‘현상즉실재론’이 일본 최초의 독자적 철학이라는 교토학파에 논리적 기초를 제공한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윤리학’ ‘미학’ ‘언어학’ 등도 그가 만든 번역어다.메이지 정부는 1889년, 국가주의와 유교주
〈연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서해문집, 2024)은 30대 기자이자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서해문집, 2021)을 쓴 저자이기도 한 전혜원과 연금·재정을 오랫동안 연구한 60대 사회학자 오건호의 대담집이다. 국민연금은 1986년 국민연금법이 공포된 이후, 2006년부터 전 국민에게 의무 가입이 적용되었다. 국민연금은 경제활동이 끊긴 노동자들의 노후를 위한 국가정책으로, 개개의 시민에게 민간 보험사보다는 국가가 좀 더 보편적인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제도다.2023년 11월 기준으로 남성 노령연금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실존주의자는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웬만해서는 세계에 함부로 내던져지지 않는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민음사, 1990)에서 그들의 성급한 형이상학을 이렇게 공박한다.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지기에 앞서, 집이라는 요람에 놓여지는 것이다. 삶은 잘 시작된다. 삶은 집의 품속에 포근하게 숨겨지고 보호되어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이 언젠가는 요람 밖으로 내쳐진다는 사실을 바슐라르 또한 모르지 않는다. 다만 실존주의는 인간이 안락한 상태에 놓였던 시원의 단계를 그냥 지나쳤다. 그래서 바슐라르
2004년 9월5일 노무현 대통령은 MBC 〈시사매거진 2580〉 방송을 통해 국가보안법(국보법) 폐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탄핵 소추에 대한 여론의 반발로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은 그해 10월, 100명이 넘는 의원의 이름으로 국보법 폐지 법안을 발의했다.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정당 한나라당도 2005년 4월 개정안을 내놓았다. 문제가 된 조항은 ‘찬양 및 고무’ 등에 관한 제7조와 ‘불고지’를 다룬 제10조였다.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열린우리당 내 강경파와 일부 조항만 개정하자는 한나라당의 견해가 맞선
〈초가삼간 오막살이〉(브로콜리숲, 2024)는 이문길의 열일곱 번째 시집이다. 1939년 대구에서 출생한 시인은 1959년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수료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등단을 하고 나서 시집을 내는 것이 순서이지만 시인은 대구에서 첫 번째 시집 〈허생의 살구나무〉(흐름사, 1981)와 두 번째 시집 〈내 잠이 아무리 깊기로서니〉(흐름사, 1983)를 먼저 냈다. 그러고는 한참 뒤인 1998년 〈현대문학〉을 통해 가로늦게 등단 과정을 밟았다. 등단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피노키오로 철학하기〉(효형출판, 2023)에는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의 모험〉(1883)과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이 동화를 해석한 〈피노키오. 두 번의 해설과 세 번의 그림이 있는 인형의 모험 이야기〉(2021)가 합본되어 있다. 475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반도에는 1400여 년간 통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1861년, 마침내 이탈리아 건국이 이루어지자 콜로디는 지역주의와 전근대성으로 낙후된 조국을 근대적으로 계몽하기 위해 저 교훈적인 동화를 썼다. 나무토막에서 꼭두각시 인형으로 탄생한 피노키오는 인
신성아의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마티, 2023)은 독자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간다. 국회의원 보좌관이던 지은이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소아백혈병 진단을 받자 직장에 사표를 내고 딸의 전속 간병인이 되었다. 할리우드의 재난 영화는 가족의 재발견으로 끝난다. 갈등과 앙금은 해소되고, 용서와 화해를 바탕으로 가족의 귀중한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집안에 중환자가 생겨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간병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지은이도 새삼 놀랐듯이 “이 글은 소재를 배신하고 말았다. 아이의 병에서 출발했으면서도 아이를 중심
연예인에게 열광하듯이 정치인을 따르는 사람을 ‘정치 팬덤’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이 현상은 ‘노사모’가 결성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지만, 대중의 정치인 숭배는 그제야 생겨난 게 아니다. 대중의 갈채와 환호를 받아온 영웅은 언제나 있었다. 1980년대의 김영삼·김종필만 해도 열렬 지지자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3김 시대의 지지지와 오늘의 정치 팬덤은 성격이 다르다. 사회학자 조은혜는 〈‘팬덤 정치’라는 낙인〉(오월의봄, 2023)에서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묶어 이른바 ‘3김 시대’로 칭했던 ‘보스
강지나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돌베개, 2023)는 빈곤가정의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마주한 문제를 밝힌다. 지은이는 이 책을 쓰기 위해 2016년부터 열예닐곱 살의 청소년 여섯 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스무 살이 넘도록 심층 면담을 거듭했다(2018년에 특성화고 출신 청소년 두 명이 추가되어 총 여덟 명이 되었다). 지은이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빈곤층의 삶을 팔아 이용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스스로 책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다행히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28년 전에 읽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드러눕는 개〉가 〈엎드리는 개〉(안온북스, 2023)라는 제목으로 새로 번역되었다. 1954년 열여덟의 나이로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한 사강은 이 한 작품으로 단번에 한 시대의 문학 영웅이 되었다. 비평가들은 ‘사강의 세계’ 또는 ‘사강스럽다’를 뜻하는 ‘Univers Saganesque’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사강이 고작 20대 중반일 때 두 권이나 되는 전기가 나왔다. 사강의 남자친구 베르나르 프랑크는 마리 도미니크 르비에브르의 〈사강 탐구하기〉(소담출판사, 2012)에서 “전쟁 이후 프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작품을 쓴 이중언어 작가다. 그가 두 개 언어로 작품을 쓰게 된 이유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면서 부모를 따라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 런던, 베를린, 파리를 떠돌아다녔던 그는 ‘V. 시린’이라는 필명으로 시, 희곡, 소설, 평론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에미그레 사회’(러시아 망명객 사회)에서 유명해졌다. 파리 생활을 끝으로 1940년 5월 미국에 정착한 그는 여러 유명 대학에서 러시아·유럽 문학을 강의하면서 영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58년 간신히 출간된 〈롤리타
정혜실의 〈우리 안의 인종주의〉(메멘토, 2023)에는 한국 정부와 사회가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난민, 무슬림에게 행사하는 제도적 인종차별 사례가 가득하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아시아 곳곳에서 찾아온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사이의 ‘다문화 결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문화 결혼을 한 부부는 똑같은 국제결혼이지만 ‘글로벌 패밀리’라고 불리는 백인과 한국인 부부가 당연히 누리는 법적·제도적 처우를 받지 못한다. 많은 제약을 뚫고 혼인신고를 마친 이주민 배우자는 영주나 귀화를 위해 국가에 또 한번 ‘결혼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