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혈맹 관계라는 여운이 미·소 양국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던 1946년 2월. 모스크바 주재 대리공사이던 조지 케넌은 이른바 를 작성해 미국 국무부에 송신했다. 그는 소련이 안보적 불안과 마르크스레닌주의 도그마 등의 이유로 외부 팽창을 추구할 것임을 예견함과 동시에, 자체 모순 때문에 장기적으로 내파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에 기초해 케넌은 서유럽과 극동 등 주요 산업지역에 방어선을 설정해 공산 세력의 팽창을 저지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봉쇄(containment)’ 전략의 시작이었으며, 실제 1991년 소비에트가 스스로 몰락함으로써 케넌은 희대의 대전략가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1994년 2월, 그의 90세 생일을 맞아 미국 외교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가 개최한 초청 강연회에서 케넌은 뜻밖에도 지난 냉전에 대해 를 남겼다. 그에 따르면 애초에 봉쇄정책은 일차적으로 ‘외교·정치적 임무’의 성격을 띤 것으로 모스크바 수뇌부에게 더 이상의 팽창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각인시킴으로써 유럽에서의 세력권 설정에 대한 ‘진지한 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마셜플랜이 실행되고 베를린 봉쇄가 무위로 돌아간 이후 소련은 외교적 타협의 가능성을 타진해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케넌은 바로 이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절망스러운 시기였다고 고백한다. 서방 측이 어떠한 지정학적 타협도 거부한 채 사실상 동방 진영의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해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비타협적 태도 때문에 40년간의 냉전이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어마어마한 양의 군사비 지출은 물론이고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소멸의 위험과 같은 재앙적 비용을 치르고 말았다는 것이 케넌의 결론이었다.
그는 이런 비극적 결과가 초래된 것이 “협상을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소심했기 때문”이었다고 힐난조로 비판하지만, 사실은 냉전기 미국 외교정책 노선상의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케넌이 주창한 ‘현실주의적’ 봉쇄전략이 강대국 간의 지정학적 교섭과 세력균형을 통한 잠정적 공존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반면, 20세기 중반 실제 구현된 봉쇄정책은 이와는 전혀 다른 철학적 기반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미·중 전략경쟁 시대의 경고음
즉, 당대 미국 엘리트층의 주류적 인식 틀은 미·소 관계를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성격에 기반해 신학적 선악 구도로 규정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대표적으로 냉전 초기 대소련 전략 형성 과정의 기념비적 문건으로 남아 있는 과 등은 양 초강대국 간 경쟁을 자유주의 사회 대 전체주의(또는 노예제) 사회의 체제적 갈등으로 해석했다. 이는 냉전 시기 전반에 걸쳐 미국 사회 내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냉전 자유주의’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해석 프레임 속에서는 두 진영 간의 타협 불가능성만 부각되었으며, 전 지구적 개입, 특히 군사주의적 대응이 처방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구냉전기에 쿠바 미사일 사태나 베트남전쟁 같은 위기 상황이 연속적으로 초래되는 원인을 마련했다.
핵무기 시대에 상대방의 제거나 흡수는 불가능하며, 안정적 병립이라는 잠정적 해법 이외의 대안은 부재하다는 불편한 진실은, 지구 전체를 위태롭게 만든 계기들이 연거푸 반복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잠정 합의)의 순간이 찾아온 때가 바로 1970년대 데탕트(détente) 국면이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미·소·중 3대 강대국 간의 평화공존 및 군비통제 합의가 본격적으로 협상되기 시작했다. 물론 최종적인 안정은 다시 한번 1980년대 초반 2차 냉전의 격화를 거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로널드 레이건 사이의 극적인 화해를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새삼 ‘구’냉전의 오래된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계질서가 갈수록 ‘신’냉전으로 진입하는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 열강 간 갈등이 잠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단극체제의 균열이 뚜렷해지면서, 미·중(러) 사이의 전략경쟁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다. 어느 유명 해외 드라마의 중심 테마에 비유컨대, 상대적으로 자비로운 환경이었던 긴 여름이 종식되고, 다시금 강대국 정치의 비극이 반복되는 긴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다시 관건이 되는 것은 미국의 전략적 선택이다. 탈냉전 시대의 종언 이후 새롭게 출현한 양극(혹은 다극) 질서에 직면해 워싱턴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갈수록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형성되어온 미국의 새로운 전략적 컨센서스는 ‘트루먼적 계기(Truman moment)’의 재림이라고 일컬을 만한 것이다. 미국이 용인해준 지구화 시대의 혜택에 올라타 성장한 중국이 ‘배은망덕’하게도 규칙 기반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신)냉전 자유주의 노선이 양대 정당의 경계를 넘어 화려하게 부활했다. 민주 진영 대 반민주 진영으로 양분된 세계 이미지를 상상하는, 유사 반공주의적인 지적 흐름이 다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특히 조 바이든 정부의 대전략 기조는 트루먼 독트린의 업데이트 판본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최고위 전략 문건과 대통령 연설 등을 통해 계속 강조되었던 ‘역사의 변곡점’ 담론은 오늘날 강대국 간 세력 경쟁을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이념·체제 간 충돌로 프레이밍하고 있으며, 이 마니교적 선악 구도의 거대 서사가 바이든 정권의 외교정책 전반을 규정해왔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뒤이은 모스크바-베이징의 밀착 행보는 자유 대 반자유의 ‘아마겟돈적 대결’이라는 의 핵심 세계관을 입증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로써 신냉전 초입의 미국은 다시 한번 민주 진영의 수장으로서 향후 인류의 운명을 가를 ‘결정적 10년’의 기간에 자유주의적 서방을 재결집하여 권위주의적 동방에 대항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오는 11월 대선에서 바이든의 정책 노선을 거의 그대로 계승할 카멀라 해리스가 당선되든, 아니면 이미 1기 정부에서 가 재선되든 (신)냉전 자유주의에 기반한 대중 강경책의 골간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외정책에서 이러한 이념적 요소의 강화는 상대를 불구대천의 ‘악’으로 규정해버리는 경향성 때문에 타협과 협상의 외교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만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구냉전 시대와 달리 신냉전 시대에는 미국·러시아에 더해 중국까지 3대 핵 강국이 경쟁을 벌여 억지 메커니즘의 동학이 훨씬 복잡해지고 있다. 더구나 인공지능(AI) 기술까지 핵병기에 접합되면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대재앙 촉발의 위험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기후변화, 팬데믹과 같은 인류 공통의 다중위기 요소들까지 계산에 넣을 경우, 강대국 간 제로섬 경쟁으로 인한 글로벌 거버넌스의 기능부전이 가져올 미래의 후과는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류가 지난 구냉전의 경험에서 무언가 배운 교훈이 있다면, 어떻게 1950~1960년대에 목도한 비타협적 이념·체제 갈등의 기간을 빠르게 단축하고, 1970년대와 같은 안정적 공존과 상호 군비통제 제도화의 길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케넌의 후예라 할 수 있는 몇몇 현실주의 이론가들의 제안에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가령, 미국외교협회(은 다극체제의 도래와 함께 자유주의 세계질서 프로젝트가 실패했음을 시인하고, 그 대안으로 19세기적 강대국 간 협조체제를 제시해 눈길을 끈다. 이는 국내 레짐의 성격을 문제 삼지 않고 모든 강대국의 정치체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열강 간 합의된 규범을 만들어나가고, 지정학적 위기 발생 시 주도국 간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물론 그동안 서구가 추구해온 자유국제질서에 크게 미달하는 현실정치적(realpolitik) 접근방법이지만, 이들은 “바람직하지만 불가능한 목표 대신 작동 가능하고 획득 가능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정책가들의 책무라고 주장한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운신의 폭 넓히려면
다음으로, 의 경우,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 발생 가능성이 없다는 기존 통념(경제적 상호의존, 핵 억지, 국제제도 등의 변수에 기반한 낙관론)을 비판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한 세기 전 영국과 독일 사이의 갈등과 오늘날 미·중 경쟁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평행성을 강조한다. 즉, 영국이 독일의 부상을 유화적으로 잘 다루지 못해 대전쟁으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중국의 굴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미래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레인이 제시하는 대안 전략은 베이징과의 관계를 전통적인 의미의 현실주의적 열강 간 경쟁으로 다루는 방법이다. 중국의 강대국화와 지역 패권 주장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어떻게 평화로운 타협을 이끌어낼지를 궁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무리한 견제나 공세적 봉쇄 대신 중국에 동아시아의 지배권을 일정 부분 넘김으로써 파국적 전쟁을 회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신구 냉전시대 미국의 대전략 선택에 대한 논의는 사실 우리에게도 큰 함의를 지닌다. 현 대한민국 정권도 오늘날의 시대 전환을 신냉전의 도래로 규정짓고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 전략을 마련해왔다. 지난해 6월 발표된 의 서문은 “오늘날 우리는 역사의 변곡점 앞에 서 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윤 대통령은 여러 차례 연설을 통해 오늘날 “자유주의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 간 체제 대결”이 심화되고 있으며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세력”이야말로 현 인류의 최대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이처럼 동시대를 바라보는 인식 프레임과 사용 언어 면에서 윤석열 정부는 앞서 살펴본 바이든 정권과 거의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왔다.
이런 맥락에서 소위 “글로벌 중추 국가” 비전이란 “미국과 함께 세계시민의 자유를 지키고 확장하는 ‘자유의 나침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즉, 미국식 (신)냉전 자유주의에 동조하여 이데올로기적 구분 선에 따른 세계 진영화에 앞장서는 것이 한국의 대외적 역할로 제시되었다. 지난해 8월 선언된’ 역시 이와 같은 전략적 흐름의 정점이었다. 윤 대통령은 이라고 한·미·일 3국 협력체의 성격을 정의함으로써, 대중국 견제 연합의 구성에 한국이 참여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구냉전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념적 요소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외교 전략상 비타협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 열강 간 경쟁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중간국의 입장에서 이는 융통성 없고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물론 한국·미국·일본이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동아시아 지역 내 세력 배분 변화에 조응하는 측면이 있다. 중국이 부상할수록 역내의 현상 변경을 추구할 것이기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이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는 것은 현실정치적 관점에서도 논리적이다.
하지만 3개국이 같이 가야 하는 이유가 힘의 균형이 아닌 ‘자유’라는 가치 때문이라고 문제를 설정할 경우 우리의 진로는 위태로워진다. 다시 말해, 현재 상황을 (신)냉전 자유주의에 입각해 “보편적 가치와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는 부인”하는사이의 체제 대결로 규정하게 되면, 협상이나 타협이 불가능한 일종의 종교적 선악 구도로 우리의 외교적 운신 폭이 제약되어버린다.
이 지점에서도 우리는 구냉전 시대에서 한 가지 교훈 사례를 얻을 수 있다. 미·소 대결이 가시화되던 시기, 서유럽에서는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항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조직되었으며, 이러한 다자 동맹체의 건설은 공산 진영에 맞서 세력균형을 형성하기 위한 필수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나토 내부에서도 프랑스나 서독과 같은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정책 공간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나토 탈퇴와 독자적 핵 개발 등의 결단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서독 또한 동방정책 같은 자주적 어젠다를 가지고 미·소 냉전구조의 틈새를 만들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신냉전의 초입에 다다른 현재의 역사적 국면에서 한·미·일 협력을 포함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격자형 파트너십 강화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일정 부분 현실정치적 필요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조적 제약하에서 구냉전 시대의 파리나 본처럼 향후 서울이 독자적인 의제를 담보하는 문제, 즉 예를 들어 타이완해협이나 북핵 문제 등에 대해 어떻게 이니셔티브를 쥐고서 미국을 설득하거나 일정한 거리 유지를 할 수 있을지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는 이미 다가온 탈단극 시대, 우리와 같은 중견국가가 국익을 추구하는 데 사활적 화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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