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인플루언서〉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심으로 생존하라.’ 넷플릭스 예능 〈더 인플루언서〉 포스터에 쓰인 문구다. 이 프로그램의 성격을 집약하는 동시에, SNS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을 일컫는 인플루언서(influencer)의 특성을 요약하는 말이다. 국내 인플루언서 77인이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 서바이벌을 벌인다. 나쁜 의미에서든 좋은 의미에서든 관심을 받고 생존해야 다음 경연을 치를 수 있다. 8월6일부터 순차 공개된 후 호평과 혹평이 동시에 나오고 있는 〈더 인플루언서〉는 어느덧 시대정신이 된 ‘인플루언서’의 본질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참가자 77인의 면모가 화려하다. ‘싸이월드 시대’를 언급하며 자신을 원조 인플루언서로 명명하는 배우 장근석, 유튜브 크리에이터 이사배, 빠니보틀, 장지수, 대도서관, 해외 구독자를 통틀어 팔로어 수만 2750만명에 달하는 틱토커 시아지우, 최근 방시혁 하이브 대표와 함께 있는 사진으로 화제가 된 아프리카TV BJ 과즙세연 등 다양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출을 맡은 이재석 PD는 8월6일 제작발표회에서 “현재 인플루언서 마케팅 시장은 4000억원 규모이고 출연자 77인의 총 팔로어 수는 1억2000만명이다. 국내를 넘어 유튜브, 틱톡 등 전 세계적으로 세분화된 콘텐츠를 즐기는 시대다. 한 명 한 명이 콘텐츠인 다재다능한 인플루언서들을 한자리에 모으면, 그만큼 큰 재미와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단지 팔로어 수가 아니라 ‘만날수록 더 궁금해지는 사람'을 기준으로, 섭외에만 5개월간 공을 들였다.
인플루언서를 전면에 내세우는 만큼 소셜미디어 세계의 법칙을 경연 방식에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기준은 숫자다. 또 다른 연출자 손수정 PD는 “인플루언서의 힘을 비교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 요소는 구독자, 팔로어 수, 조회수 등 ‘숫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숫자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미션을 개발했다“라고 밝혔다. 처음부터 팔로어 수를 기준으로 각 출연자의 몸값이 정해지고 각각은 그 금액이 적힌 전자기기를 목에 찬다. 누구나 상대의 몸값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이 금액의 총합은 우승 상금 3억원이다. 각 미션의 우승자는 탈락자의 몸값을 흡수한다. 숫자라는 기준은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플랫폼별 차이를 언급하며 납득하지 못하는 참가자도 있다.
첫 번째 라운드는 ‘좋아요/싫어요’ 미션이다. 모두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참가자에게 ‘좋아요’와 ‘싫어요’를 열다섯 번씩 누른다. 서로의 소개 영상을 보고 제한 시간 안에 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플랫폼 출신끼리 뭉쳐 다른 플랫폼 1위에게 ‘싫어요’를 몰아주는 전략이 나오기도 하고, 자신에게 ‘좋아요’를 주지 않으면 ‘싫어요’를 누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자신을 어필할 수 있도록 마련된 무대 위에 누가 나설 때마다 그의 ‘싫어요’가 늘어나는 걸 보고 누군가 “본인도 인플루언서면서 나대는 사람은 싫은가 봐”라고 말하는 건 웃음 포인트다. ‘좋아요’를 받고 ‘싫어요’를 피하기 위해 웃고 우는 가운데, 유튜버 진용진은 제작진의 의도를 간파한다. ‘좋아요’든 ‘싫어요’든 많이 받는 게 이로울 거라고 추측한 그는 이상한 행동과 말, 즉 ‘어그로’ 끄는 행동을 통해 ‘싫어요’를 다수 받는다. 결과적으로 그의 전략은 들어맞는다.
이어서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라이브 방송’ 미션이 이어진다. 유명 연예인을 게스트로 섭외해 눈길을 끄는 사람도 있고, 생방송 중 이성에게 실시간으로 고백함으로써 시청자 수를 늘리는 이도 있다. ‘채널 수익 공개’ 같은 메시지로 시선을 잡아두는가 하면 카메라 앞에서 계속 옷을 갈아입는 여성 출연자도 있다. 노출로 시선을 끄는 케이스다. 탈락 위기에 처한 유튜버 장지수는 ‘넷플릭스 소신 발언 합니다’ 같은 제목으로 관심을 끌어 기사회생한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시청자는 생존자들의 속성이 콘텐츠 크리에이터라기보다 ‘어그로 전문가’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경연이라는 프로그램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인플루언서 세계의 법칙이기도 하다. 콘텐츠의 질보다, 어그로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프로그램적 소회와 보고 나서 느끼는 점이 좀 다르다. 기획 면에서 새로운 부분은 분명히 있다. 형식은 서바이벌인데 등장하는 인물이 인플루언서라 미션도, 풀어가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결국 누가 미션을 통과하는지 보면 콘텐츠의 창의성보다 ‘관종’ 노하우를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다. 우리가 실제 매일 들여다보는 소셜미디어가 그런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데서 오는 씁쓸함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사배는 어떻게 순위권에 올랐나
‘도파민 범벅’이라는 SNS 세계의 특징을 가장 여실하게 보여주는 건 세 번째 라운드인 ‘SNS 피드 미션’이다. 두 명이 짝을 이뤄 SNS 피드 사진을 찍어 올리고 누가 관심을 많이 받는지 겨룬다. 게임의 속성을 빠르게 간파한 출연진은 주어진 세트의 지형 지물을 활용하기보다, 선정성에 초점을 맞춰 미션을 해결한다. 장근석-마이부 커플은 나란히 얼굴 사진을 찍고 ‘장근석 현재 난리 난 여자친구 사진 유출’이라는 문구를 붙여서 높은 관심을 받는다. 이 회차가 공개된 후 나온 실제 기사 제목도 이렇다. “장근석, 열애설 공개? 현재 난리 난 여자친구 사진 유출. 호기심 자극 목적.” ‘낚시용 기사’가 인플루언서 시대의 문법을 완성시켰다.
이어진 미션에서는 팀의 절반이 가슴 노출 사진을 내세운다. 톱4 중 거의 유일하게 콘텐츠로 승부해온 이사배 뷰티 크리에이터는 “나는 가슴을 안 보여줬어”라고 자조하며 “어떻게 1등을 하냐. 다들 도파민에 절어 있는데”라고 말한다. 의외로 이사배는 ‘가슴들’을 이기고 순위권에 오른다. 피로도가 관성을 이겼다. 복길 자유기고가는 “(이재석 PD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도 그렇고, 여성의 신체 노출이 나오면 시청자 반응이 올라간다는 게 이 세계에서는 당연한 논리라고 말해왔는데 이번에도 그걸 전면에 내세운 것 같다. 대체로 남성 팔로어가 많은 출연자들이어서 예상은 되었지만 그 안에서도 좀 다르게, 내 방식대로 할 거라고 고군분투하는 분들이 있고 그걸 시청자가 읽어낸 건 참신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라이브 방송 미션을 보면 이재석 PD의 전작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연상된다. 인터넷 생방송을 펼치는 1인 방송 대결 프로그램으로 9년 전 방영되었다. 지금과는 방송 지형이 전혀 달랐다. 정덕현 평론가는 “텔레비전 시대에서 인터넷 방송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연예인과 인플루언서 1세대 등이 출연했는데, 9년 사이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이제 인플루언서들이 연예인을 게스트로 부르는 데 이르렀다”라고 말했다.
〈더 인플루언서〉는 공개 전부터 논란이 많았다. 암호화폐 사기 연루 의혹을 받는 유튜버 오킹의 출연이 예고된 데다 일찌감치 경연 우승자의 실체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논란마저 무감하게 소화하는 과정 자체가 인플루언서 시대의 반영일까? 결과적으로 오킹의 분량은 대거 삭제되었지만 스스로 ‘선한 영향력’을 끼친 유튜버라 설파하는 장면이 등장해,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한 착각이 인다. 복길 자유기고가는 “PD조차 여론을 의식하고 인플루언서처럼 ‘나락 감지 센서’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시청자도 인플루언서적 감각을 가지고 자기 주장을 반영해 SNS에 관련 게시물을 올린다”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관심으로 생존하라’는 시대의 의제를 제작자·출연진·시청자 모두가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프로그램이 공개된 후 참가자들은 일제히 출연 후기를 콘텐츠로 제작해 자신의 채널에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