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의과대학의 본과생으로, 2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다른 생각을 가진 의대생/전공의(@any_medics)’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했다. 올해 초 학교를 떠난 의대생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다. 사태 초기 정부도 시민들도, 그리고 의대 내부에서도 의대생들의 수업 거부가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의대 입시 일정이 시작된 8월에도 의사들이 지금의 단결을 유지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비타협적 낙관론이 의대생·의사 커뮤니티 내에 팽배하다.

메디스태프는 의사 면허나 학생증을 통해 의사나 의대생임을 인증해야 가입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다.
메디스태프는 의사 면허나 학생증을 통해 의사나 의대생임을 인증해야 가입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다.

‘메디스태프(medistaff)’는 의사 면허나 학생증을 통해 의사나 의대생임을 인증해야 가입할 수 있는 익명 의사 커뮤니티이다. 언론에는 3월 초 ‘참의사 리스트(사직하지 않은 전공의를 참의사라고 조롱하며 병원과 실명, 출신 대학과 학번을 공개한 사건)’과 병상 가동률 하위권 병원에 메달을 수여한(병상 가동률이 낮을수록 전공의들의 단체행동이 위력을 발휘했다는 의미) 일로 이 사이트가 알려진 바 있다.

이곳에 올라오는 글은 크게 세 부류이다. 한 부류는 이 사태를 촉발한 윤석열 정부와 의사를 지지하지 않는 대중에 대한 증오, 다른 하나는 한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한 타 직역에 대한 비하, 마지막은 단체행동에 미온적인 전공의·의대생에 대한 저격과 보복 다짐이다. 이 커뮤니티는 이용자에 대한 차단과 신고 기능을 제공한다. 단체행동에 대해 비관적 전망이나 정책의 합리적 면을 평가하는 사용자는 보건복지부의 첩자로 몰리며, 다른 사용자에 의해 차단과 신고를 당해 커뮤니티에 의견을 게시할 수 없게 된다. 이곳에는 결국 대형병원 파산에 의한 의료 붕괴 예언과 그로 인해 결국 정부는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는 낙관론, 단체행동의 위력을 유지하는 데에 방해되는 이들(복귀 전공의와 수업을 듣는 의대생)을 제거해야 한다는 전체주의만이 남는다.

자율적인 의대에는 ‘꼴통’ 딱지

메디스태프에서 개진되는 과격한 의견들은 곧바로 몇 주 이내에 각 의과대학의 학생 총회 안건이 되었다. 일례로 3월 개강 이후 타 학과와 함께 수업을 듣는 예과생(의대 1~2학년)들은 자율적으로 수업을 계속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기존 방침이었으나, 4월 중순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자 메디스태프 이용자들은 예과생들의 중간고사 거부를 요구했다. 이에 각 학교 학생회는 이것을 안건으로 올려 총회를 열고 예과생들의 중간고사 거부를 사실상 종용했다. 각 학교의 예과생 교양과목 거부 현황은 목록으로 정리되어 실시간으로 메디스태프에 게시되었다. 메디스태프 이용자들은 학교 간에 더 강경한 투쟁의 경쟁을 붙이며, 빠르게 교양 과목 거부를 의결한 학교는 칭송했고 마지막까지 예과생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기로 결정한 학교에는 꼴통 학교 딱지를 붙였다. 이 과정에서 F 학점을 감수해야 하는 예과생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다.

2월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전공의협의회 임시회의가 열리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2월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전공의협의회 임시회의가 열리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익명 커뮤니티가 조성한 전체주의적 분위기는 각 학교 단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의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동맹휴학에 회의를 제기하는 의견은 ‘단일 대오를 해치는 주장’으로 여겨졌다. 단체행동의 종료 시점에 대한 문의나 학생들의 여론을 확인하기 위한 무기명 투표 제안 또한 묵살되었다. 2월과 3월에 행해진 의대협(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 차원의 전체 설문 결과는 반대 의견이 가시화되면 단일 대오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의대협에 의해 자의적으로 비공개되었다. 의대생들은 사실상 다른 의견을 갖거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의견을 가진 동료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폐쇄적인 온라인 커뮤니티가 의대생과 전공의들에게 이식한 비타협성과 폭력성은 의대 정원 외의 다른 문제들이 협의될 공간마저 지워버리고 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지난 2월 단체 사직을 결의하며 ‘7대 요구안’을 발표했다. ①필수의료 패키지와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 ②의료 인력 추계를 위한 기구 설치 ③수련병원의 전문의 채용 확대 ④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한 의료인의 책임 완화 ⑤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⑥전공의에 대한 행정명령 철회 및 전공의에 대한 사과 ⑦의료인의 업무개시명령 폐지. 대전협 비대위는 ‘7대 요구안’이 관철되지 않는 한 대화도 없을 것이며 전공의와 의대생들의 복귀도 없다는 입장을 6개월째 고수하고 있다.

황당한 부분도 있지만, 이들 요구안은 대체로 의료인의 노동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나는 의료계가 의대 정원 문제를 일부 양보하고 전공의 근무시간 단축, 수련병원의 전문의 채용 확대와 전공의의 급여 인상을 얻어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의대 정원보다 더 실질적으로 전공의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며, 전공의들을 착취하여 수백억 원 수익을 올리는 대형병원의 경영 관행을 바꾸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기적으로 한국의 의료 인력 배분 방식의 고질적 문제를 개혁하는 일이기도 하다.

의대 입시 일정이 시작된 8월까지도 의대생들은 학교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수도권 한 의과대학의 텅 빈 강의실. ⓒ시사IN 조남진
의대 입시 일정이 시작된 8월까지도 의대생들은 학교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수도권 한 의과대학의 텅 빈 강의실. ⓒ시사IN 조남진

전공의들이 직접 설문을 통해 얻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전공의 주간 평균 노동시간은 약 75시간이었다. 기록되지 않은 연장 근무를 고려하면 이보다 더 길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한국처럼 인구 대비 의사 수가 부족한 미국과 일본도 한국과 유사하게 주 80여 시간의 전공의 노동시간 상한이 있다. 그러나 비슷한 제도를 가졌음에도 미국과 일본 전공의들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전문과에 따라서 55~70시간이다. 대다수의 유럽 국가에서는 전공의의 주당 노동시간 상한이 48시간에 머문다. 한국은 전공의 연속 근무시간의 법정 상한이 36시간인데, 앞서 비교한 미국과 일본은 각각 24시간, 28시간이다. 장시간 연속 근무는 전공의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의 핵심으로, 전공의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선 연속 근무시간을 국제 기준에 맞추어 24시간 이하로 제한하는 것이 가장 절실하다.

이것들을 얻어낼 수 있다면, 적정 규모의 의대 정원 확대는 의사들에게 오히려 유익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의료 인력이 대폭 늘어나면 봉직의들의 급여 수준이 떨어질 거라는 우려도 나오지만, 고령화 심화에 따라 한동안 의료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를 고려했을 때 10년 동안 전체 의사 수의 5%가량이 추가 공급되는 것이 봉직의들의 급여를 크게 떨어뜨릴 거라고 내다보는 전망은 다소 무리가 있다.

시민들을 믿고, 우리를 믿어달라 해보자

그에 비해 전공의의 근무시간 단축, 특히 연속 근무시간 제한의 하향은 매우 시급하며 당장의 파급력도 큰 일이다. 이러한 요구가 논리적 타당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인력 확보를 위한 의대 정원 확대에 협조해야 한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의료 수요가 감소하거나 의료 인력의 부족 문제도 해소될 것이기 때문에, 증원을 합의하는 동시에 의사가 충분해지는 시점이 왔을 때는 의대 감원도 논의하도록 장기적 약속을 만들어두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왜 의료계는 이러한 협상을 하지 못하는가? 왜 나름의 협상 의지를 보이며 입법으로 의료인 처우 개선에 관심을 나타낸 정치인들도 불신하고, 수가 개선과 의료인에 대한 형사책임 완화를 약속한 보건복지부와의 모든 대화를 거부하는가? 심지어 스승인 교수들에게도 증오를 표출하고 학교와 병원의 연락마저 차단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세상 모두에 등을 돌리고 좁은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가?

4월30일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대위 긴급 심포지엄에서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왼쪽)가 발언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4월30일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대위 긴급 심포지엄에서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왼쪽)가 발언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은 누구든 실명과 함께 메디스태프에 박제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선출된 대표인 의협 회장과 대전협 비대위원장은 물론이고 각 학교 학생회 대표들도 타협이라는 카드가 없으니 상대와 대화에 나설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사실, 메디스태프 이용자들은 이들이 정부와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 자체를 배신의 징조로 여긴다. 외부의 다른 의견은 의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탁상공론이자 고소득자인 의사들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로 여긴다. 내부의 다른 의견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철부지이거나 정치권력에 굴복한 배신자로 치부된다.

선배들과 미래의 동료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시민들을 믿어보자고. 그리고 우리를 믿어달라고 해보자고. 전공의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 윤석열 정부의 무책임한 대규모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세상을 미워하기를 멈추고 사람들을 설득하여 공감을 얻고 전공의를 포함한 의료 노동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드는 데에 힘을 모으자. 그것을 위해 해야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를 차례차례 이루기 위해선 일단 우리 안의 다양한 의견에 열려 있어야 한다.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