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9일 오전 10시,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 브리핑을 하기 위해 용산 대통령실 연단에 섰다. 전공의 집단 사직 후 7개월. ‘의료 붕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기자들의 질문은 의·정 갈등을 해결할 방안에 집중됐다. “저는 얼마든지 (협상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했다. 의사 단체들과 소통해왔지만 통일된 의견이 도출이 안 된다. 저희들은 열린 마음으로 검토하겠다고 여러 번 얘기를 했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 한다. 오히려 (의대 증원 규모를) 줄이라고 한다.”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앞서 지난 4월1일에도 윤 대통령은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환자들의 진료 일정이 밀리는 등 피해 사례가 이어지자, 윤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열고 “(의료계가) 더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 통일된 안을 제시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협상에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정부는 4월21일에서야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전공의협의회 등이 포함된 협의체를 제안했지만 이마저도 진실 공방만 불러온 해프닝으로 끝났다. 당시 장상윤 대통령비서실 사회수석비서관은 “일주일 전부터 협의체 구성을 비공개로 제안했지만 (의료계가) 이마저 거부하고 있다”라고 브리핑했다. 이에 제42대 대한의사협회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해당 제안을 일절 받은 일이 없는데 누가 거절을 했다는 것이냐”라고 반박했다. 5월 말, 교육부는 2025년도 의대 정원을 1540명 늘어난 4695명으로 확정했다. 의대 교수와 의대생들이 신청한 의대 증원 집행정지가 법원에서 기각·각하되는 진통을 겪은 뒤였다. 법원이 의대 증원의 사회적 필요성을 인정했음에도 전공의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8월에 이르자 전공의 없이 돌아가던 의료 현장의 한계가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공의가 떠난 병원을 수개월째 지키던 의료진들이 지쳐서 현장을 이탈하고, 응급실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통령은 아무런 해결책 없이 사실상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근무했던 한 전공의는 “이미 ‘협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답을 딱 정해놓고는 몇 달째 ‘협의안을 가져오라’고만 하는 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는 걸 대통령 혼자만 모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7개월이 지나도록 윤 대통령이 ‘통일된 의견’만 고집하자 여당 대표마저 다른 목소리를 냈다. 8월25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고위당정협의회를 통해 ‘2025년에는 증원을 시행하되 2026년에는 보류해달라’는 제안을 대통령실에 전달했다. 그러나 이튿날 대통령실 관계자는 기자들을 만나 “정부가 여러 데이터나 근거, 미래 전망, 이런 것들을 정확히 측정해서 책임 있게 결정한 사안이다. 합의를 보거나 협상해 결정해선 안 되는 사안이다”라고 각을 세웠다. 8월27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성태윤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증원 계획과 관련해) 기존 입장에서 변한 것이 없다”라며 대통령실의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한덕수 국무총리 역시 이날 기자들에게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고통스러운 개혁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재유행에 2차 병원도 타격
문제는 ‘고통스러운 개혁의 과정’이 실제로 이미 고통을 느끼는 환자들에게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응급실 대란 우려가 커지자 8월26일 대통령실은 “최근 일부 응급실에서 단축 운영되거나 온전하게 운영되지 못하는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관리 가능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전체 응급의료기관 408곳 중 24시간 진료가 ‘일부 제한’되는 곳이 세 곳(0.73%)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수치는 현실과 상당한 괴리가 있다. 당장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운영 중인 응급실 종합상황판 사이트만 확인해봐도 알 수 있다. 8월29일 오후 7시 기준, 대통령실이 위치한 서울 용산구의 한 대학병원 사례를 보자. 이곳 응급실에서 ‘인력 부족으로 인한 진료 불가’가 여덟 과목에 달한다. 수치와 현실이 차이 나는 이유에 대해 묻자 보건복지부(복지부) 관계자는 이렇게 답했다.
“종합상황판 수치는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올리기 때문에 업데이트 주기가 제각각이라 공식적으로 인용할 수 없다. 그 시간대 진료가 안 된다는 의미이지 확실하게 24시간 진료가 안 되거나 병상 운영을 축소한 곳이라고 볼 수 없다. 만약 이 모든 경우까지 차질로 보면 당연히 환자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8월26일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현장 실체보다 과장된 내용들이 과도하게 나와 있고 특정 사례가 부각되고 있다”라고 발언한 것과 비슷한 논리다. 한 국민의힘 지도부 관계자는 “(대통령실의 현실) 인식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이번 의대 증원 건을 자신의 승패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 같다. 당에서도 고민이 많다”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응급실의 기능이 하나둘씩 꺼져가는 가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가 재유행하자 흔히 ‘중소병원’으로 불리는 2차 병원까지 부담이 오기 시작했다. 경기도의 한 2차 종합병원에서 근무 중인 내과 의사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전했다. “이제 여기도 환자들이 몰려드니까 병실이 없다. 요양원·요양병원 환자는 대학병원에 잘 가지 않고 중소병원인 우리가 받아서 케어한 뒤 돌려보내는데 지금 이 과정도 지연되고 있다. 하루이틀 입원이 지연되더라도 건강이 취약한 노인들에게는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응급실 대란과 코로나19 재확산이 겹친 이 난리통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사각지대 중 한 곳이 바로 요양원과 요양병원이다.”
코로나19 치료제를 미리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던 점도 일선 의료 현장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원래 질병관리청(질병청)은 올해 상반기에 코로나19 치료제를 건강보험에 등재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부가 치료제를 일괄 구매해 각 의료기관에 배분하지 않고도 의료기관이 직접 치료제를 사들여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등재 절차가 예상보다 길어지는 와중에 코로나19 재확산이 닥쳐 치료제 수급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질병청 관계자는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져서 처방이 적극적으로 이뤄진 측면도 있다”라고 해명했다. “예년에 비해 급격히 환자가 발생했다. 그래도 환자 발생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자마자 선계약을 진행해 코로나19 확산세 정점에 공급을 많이 풀었다.”
8월20일 복지부는 코로나19 환자로 인한 부담을 분산하기 위해 ‘공공병원 등에 야간·주말 발열클리닉을 운영해 경증 환자를 이송시키고, 코로나19 거점병원으로 지정·운영된 경험이 있는 병원들을 협력병원으로 지정해 코로나19 환자를 적극적으로 입원 치료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최일선에서 뛴 공공병원 종사자들은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반응이다. “코로나19가 터졌을 때 ‘K방역’이니 ‘덕분에’니 하면서 추켜세우다가, 급한 불이 꺼지니까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에서 진료비 부정수급을 토해내라고 압박하더니, 다시 코로나가 유행하니까 공공병상부터 찾는 게 솔직히 좀 도의에 어긋나지 않나(수도권 한 공공병원 관계자).”
2023년 10월부터 건보공단은 전국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코로나19 진료비, 재택치료 관리비 등의 부당청구 여부를 조사했다. 한 지방의료원 원장은 “코로나19 환자 70~80%를 공공병원이 받았다. 당연히 공공병원에서 ‘빵꾸’가 많이 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재택치료 환자와 하루에 두 번 통화하는 게 원칙이었는데, 하루에 한 번 하면 부당청구가 돼버린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환자의 다섯 배를 배당했으면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루 두 번 통화할 수 있었겠나”라고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른 지방의료원 관계자는 “우리 기관은 적발된 사례가 없지만 다른 곳에서 걸린 사례를 들어보면 정신이 없어서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많더라. ‘환자 한 번만 받아달라’고 사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부정한 사람처럼 몰아가니 그때 열심히 일했던 의료진이 많이 억울해한다. 민간병원이라면 그 이익이 고스란히 원장 주머니로 들어갔겠지만, 지방의료원은 그런 것도 아니지 않나”라며 씁쓸한 분위기를 전했다.
곧 다가올 독감 예방접종 시즌 어쩌나
대학병원, 중소병원, 공공병원만 등을 돌린 게 아니다. 전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공보의가 차출된 지방 보건소는 지난 7개월 동안 ‘초토화’ 됐다. 근무 중이던 공보의 가운데 3분의 1이 대학병원으로 차출된 강원 지역의 한 보건소 소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문을 열던 보건지소마저 폐쇄했다고 말했다. “지난번에는 마취과 전문의가 필요하다고 사람을 빼가는 바람에 보건소장인 내가 진료 땜질을 했다. 보건소장이 의사가 아닌 보건소들은 더 힘든 상황이다. 지역 의료를 살리겠다고 의대 정원 늘린다더니 지금 당장 지역 의료는 죽어가고 있다.” 8월29일 국정 브리핑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의대 정원 확대가 “국민의 생명권과 건강권을 지역에 차별 없이 공정하게 보장하기 위한 개혁”이라며 그 목표를 강조했지만, 모순적이게도 지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큰 위험을 떠안게 됐다.
또 다른 도서 지역 보건소장 역시 공보의 차출로 보건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곧 다가올 첫 독감 예방접종 시즌을 걱정했다. “원래 공보의가 모두 있어도 빡빡한 연중행사가 예방접종이다. 의사가 예진을 통해 병력을 확인하고 주사를 놓은 다음 쇼크가 없는지까지 봐야 하는데 인력이 반토막 난 상황에서 이 모든 절차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의료개혁 기치 아래 의대 증원을 발표하고 7개월이 지나는 동안 윤석열 정부가 남긴 건 무엇일까. 〈시사IN〉과 인터뷰를 한 지역병원·공공병원·보건소 관계자들은 증원 찬성 여부와 관계없이 ‘대통령 한 사람의 고집’만 남았다고 입을 모은다. 증원에 찬성하는 한 수도권 공공병원 관계자는 “정말 필요한 정책이기 때문에 더욱더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됐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올해 병원을 뛰쳐나간 전공의만 1만명에 달한다. 대통령은 10~15년 뒤에 1만명이 부족하다는 추산으로 2000명 증원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지금 당장 10~15년 키워놓은 전공의가 없는 상황 아닌가. 10년 뒤 곳간을 채운다고 올해 씨앗을 다 털어버린 상황이나 다름없다.”
증원에 반대하는 한 지역 보건소 소장은 ‘정치적인 일은 잘 모르니까 답하지 않겠다’며 말을 아끼다 끝내 한마디를 보탰다. “시골에서 보건소 하나 운영하는 사람이 감히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참 ‘아마추어적’이다. 정 인원을 늘려야겠으면 두루두루 주위 의견도 듣고 현실적으로 의대가 당장 수용할 수 있는 상황 등을 고려해서 조금씩 점차 늘리면 될 일을 다짜고짜 못 박아버리는 통에 정책 싸움이 아니라 감정 싸움이 되어버렸다. 생사가 달린 환자들이 언제까지 병상에 누워 TV로 정치인들 말싸움만 지켜보고 있어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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